<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를 마치며



춤 한 번 추지 않은 날은 아예 잃어버린 날로 치자!”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를 마치며  ―



7
주 동안 진행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의 대장정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히 대장정이란 표현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거의 두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끊임없이 충격과 혼란의 폭탄을 던지는 아포리즘의 문장들을 읽고 소화하기가 마치 길고 험준한 산맥을 타고 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짐작컨대 중간에 읽기를 포기하고 제가 올린 요약 글을 읽는 것으로 자위한 분들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위대한 책들은 단 한 번의 만족스런 완독을 허용하지 않으니까요.


저 자신 무수히 많은 시도와 실패의 경험이 있음을 실토합니다. 저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의 첫 시도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상과 책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저는 어느 날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요상한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무작정 꺼내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의 호기심은 딱 두 페이지까지였습니다. 도저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책을 덮으며 저는 언제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날이 올까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가까이 지나, 그러니까 회갑을 넘긴 나이에 비로소 완독이라는 고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선생님들과 함께 재독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얼마나 제대로 읽었느냐는 질문 앞에 서면 여전히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제 사유의 얄팍함을 실감할 뿐입니다. 다음에 또 읽게 되면 좀 더 깊은 사유의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차라투스트라 읽기에 도전하신 전사 선생님들께 다시 당부 드립니다. 다 읽지 못했다고,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니체가 그토록 강조한 도전의 용기를 잃지 않는 한 다음에는 이 심원한 메시지의 문장들에 가슴 뛰는 전율을 더 많이 느끼리라 믿습니다.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최고봉에 달했을 때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죠. 단도직입적으로 니체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진 근대 인류를 구제하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니체는 당대 인간들에게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의지와 용기를 가질 것을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의 이야기가 좀 더 먼 후대에 가서야 제대로 전달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니체 사후 100년을 훌쩍 넘긴 오늘날 이제 이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 되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우리 선생님들에게만큼은 이 책이 진정한 삶의 자극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니체의 당부대로 우리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용기를 얻으리라 확신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징과 비유의 단어와 문장들. 니체는 이 운문적 묘사의 아포리즘들을 통해 자신의 핵심 사상 세 가지를 전달했습니다. 위버맨쉬(초인), 힘에의 의지(권력의지) 그리고 영원회귀가 바로 그것입니다. 니체는 이 세 개념을 480장에 걸쳐 마치 파노라마처럼 제시했습니다. 위버맨쉬가 자신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이라면 힘에의 의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 생명 에너지입니다. 이 힘에의 의지를 통해 영원회귀라는 삶의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축제를 즐기는 디오니소스 같은 인간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니체는 위버맨쉬를 향한 이런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맨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니체가 새로운 인간상 위버맨쉬를 내세운 것은 바로 신의 죽음때문입니다. 신이 죽은 세계에서 인간이 믿을 것은 이제 자기 자신과 대지뿐이라고 니체는 강조합니다. 하지만 위버맨쉬를 향한 이 길은 실로 험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무수한 상징과 비유의 언어로 신의 향수에 젖어 있는 인간들에게 가혹한 채찍을 휘두릅니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전사가 되라고, 이웃의 연민 따위에 기대지 말고 오히려 적을 사랑하라고, 자신을 짓누르는 중력의 정령에 맞서 웃고 춤추며 가볍게 날아오르라고 주문합니다. 이제 신이 아닌 자신의 신체에 깃든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요구합니다. 비록 더듬거리더라도 이것이 나의 덕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용기를 가지라고 당부합니다.


나로 하여금 너희에게 최고의 이념을 명하도록 하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 말이다.”


니체가 입이 마르도록 강조한 것은 자기 극복의 의지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그토록 독설과 저주의 말을 퍼부은 것도 결국 이 하나, 자기 극복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니체가 자기 경멸과 파멸과 몰락을 이야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의 아이, 위버맨쉬로 재탄생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니체는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힘에의 의지에서 그 가능성의 씨앗을 보았습니다. 니체는 이 힘에의 의지를 단순한 자기 보존을 뛰어넘는 보다 높은 상승 내지 승화의 욕구로 이해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다음 말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찌 새삼스럽게 존재하기를 의욕할 수 있겠는가! 생명이 있는 곳, 거기에만 의지가 있다. 그러나 나 가르치노라. 그것은 생명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라는 것을!”


그런데 니체를 마지막까지 주저하게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원회귀입니다. 영원회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토록 당당한 니체도 차마 이를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모든 존재의 삶이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되풀이 된다는 말은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실로 저주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내 니체가 이 고통스런 삶의 실체를 수용하는 용기를 냅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었던가? 나 죽음을 향해 말하련다. 좋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더 이상 영원회귀의 존재로 사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돌림노래를 모인 사람들에게 따라 불러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삶의 운명 속에서 아픔을 넘어 즐거움의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즐거움 그것은 가슴을 에는 고뇌보다 더 깊다./ 아픔은 말한다.: 사라 져라!/ 그러나 모든 즐거움은 영원을 소망한다-. 깊디 깊은 영원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장 나쁜 독자는 약탈하는 군인들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취하고, 나머지는 더럽히고 엉클어뜨리며 전체를 모욕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니체의 달콤하면서 힘을 주는 금언들을 취하는데 그치지 않고 원전 읽기에 도전했습니다.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을지라도 우리의 읽기는 니체의 정신을 왜곡시키지 않은 도전이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들 각자의 가슴에 새겨진 글귀라면 실로 보석 같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에게는 어떤 글귀가 가장 크게 마음에 남나요? 그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기며 힘차게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저의 마음에 와 닿은 너무나 많은 문장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두 글귀를 발췌하며 글을 마칩니다.


춤 한 번 추지 않은 날은 아예 잃어버린 날로 치자! 그리고 큰 웃음 하나 함께 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


높은 종에 속하면 속할수록 성공하는 경우가 그만큼 드물다.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는 실패하지 않았는가? 용기를 잃지 말라, 그게 무슨 문제라고!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마땅한 방식으로 그대 자신들을 비웃어주는 법을 익히도록 하라!”


글 / 윤영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