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까짓 거! 비가 와도 그냥 맞고 가자!"
- 닥쳐오는 시련, 도망가거나 피하지 말자는 의지 담고 있어 -
《이까짓 거!》 박현주 작가 초청 북토크 주요 대담
△대담을 나누고 있는 박현주 작가(사진 우측)와 오수민 선생님
숭례문학당이 준비한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첫 번째 북토크 초대 손님으로《이까짓 거!》(이야기꽃)의 저자 박현주 작가를 모셨습니다.
봄을 재촉하는 꽃샘추위가 스며들던 3월 13일(월) 저녁, 숭례문학당 8층 북라운지에서 7시 30분부터 9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박 작가와 함께 그림책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창작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눴습니다.
이번 행사는 숭례문학당에서 강사와 리더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오수민 선생님이 직접 대담을 맡아 진행해주었습니다. 오 선생님은《그림책 모임 잘하는 법》(북바이북)의 공저자이기도 합니다. 박현주 작가를 좋아하는 그림책 독자와 숭례문학당 회원들이 참석한 이날의 주요 대담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오수민 :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숭례문학당의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첫 번째 손님으로 박현주 작가님을 모시고 북토크를 진행하게 됐습니다. 참석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박 선생님은 대학에서 조소를 공부하고 졸업 후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시다 그림책에 입문, 《나 때문에》, 《비밀이야》, 《이까짓 거!》 등 좋은 작품을 쓰고 그려 많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숭례문학당에서 그림책 작가로는 처음 모셨는데,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림책 모임을 할 때 박 선생님의 책을 여러 번 다루었는데요, 제가 정말 좋아해서 책 추천을 요청받을 때마다 박 선생님 책은 꼭 넣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선생님을 숭례문학당에서 초청하고, 제가 또 대담을 맡게 돼서 지금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질문과 참석해주신 여러분이 적어주신 질문지를 중심으로 대담,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박 선생님의 책 가운데 《이까짓 거!》는, 제 취향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책으로 추천해 주셨습니다. 우선,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박현주 : 이 책은 제가 세 번째로 쓴 책입니다. 책 속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랍니다. 제가 아이가 둘 있어요. 비가 오던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우리 딸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어떤 여자아이가 왠지 자꾸 딸아이를 의식하더래요. 걔가 우산이 없었는데, 전화기를 들고는, 엄마, 나 어디 있는데, 언제 올거야, 하고 통화를 하더래요. 그런데, 그게 거짓 통화였대요. 진짜로 자기 엄마와 전화를 한 게 아니라 하는 척을 한 거죠.
보통 비 오는 날은 어수선하잖아요. 누구 하나 신경 쓰지도 않아요. 어떤 애들은 부모가 데리러 오고, 그냥 씩씩하게 빗속을 뛰어가는 애들도 있어요. 친구들끼리 우산을 나눠 쓰고 가는 애들도 있고. 그런데, 걔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냥 그러고 있는 거죠. 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무안해할까 봐 그냥 우리 아이랑 같이 집에 왔어요. 오면서, 마음이 참 답답했어요. 아, 이 답답한 마음이 뭘까, 하고 생각했죠. 그때 저의 심리는, 걔가 씩씩하게 빗속을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비 좀 맞으면 어때? 하고 말이죠. 가까운 곳에 문방구가 있는데, 거기까지 씩씩하게 뛰어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림책으로 그 아이를 그려야 되겠다, 그 아이에게 보여주려고 한다기보다, 그 아이의 심리와 같았던 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고 할까요?
오수민 : 아, 그랬군요. 작가님의 다른 책 《나 때문에》를 보고 있으면, 작가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져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박현주 : 저는 서울에서 자랐어요. 시골에서 자라지도 않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심심해서 죽을 정도로 뒹굴뒹굴해도 뭔가 계속 재미있는 거리를 갖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거나 집에서 종이 인형을 만들며 놀기도 했는데, 종이 인형은 특히 좋아했어요. 어린 시절에는 가게에서 종이 인형을 인쇄해서 팔았어요. 그런 건 색이 현란하잖아요. 종이도 조악하고. 다양한 포즈로 옷을 입히면 좋겠는데, 그런 인형은 단순해요. 성에 차지 않았죠. 그래서 제가 만들었어요. 종이를 접어서 옷을 입혀요. 다양한 포즈로. 제가 생각해도 재미있게 잘 만들었어요. 종이로 옷장, 침대, 이런 것도 만들었어요. 저한테는 엄청 소중했어요.
어릴 때 가난했어요. 다른 집은 마당도 있는데, 우리 집은 없었어요. 그래서 갈망이 생겨요. 저렇게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그래서 그런 집을 종이 인형으로 만들었죠. 그렇게 갈망을 해소했다고 할까요? 상상하고 공상하면서 재미있어했어요.
어린 시절 생각을 하니, 그때 제 친구들이 생각나요. 그 당시, 아마 70년대 후반쯤 됐을까요? 옆집 친구가 있었어요. 걔가 어느 날 저를 불러서 갔더니, 천장에서 뭘 꺼내요. 보니 쥐예요. 갓 태어난 생쥐였어요. 생쥐는 회색이에요. 세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어요. 그때는, 쥐는 무조건 잡아서 죽이는 거였어요. 걔가 그걸 보여준 거예요. 결국엔 걔 엄마한테 들켰어요. 걔 엄마가 없앴죠. 울고불고 난리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걔는 그걸 햄스터 키우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징그러워하지도 않고. 어린 마음에 그거라도 키우고 싶었던. 일곱 살, 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 놀다가 배고프면 자기 집에 오라고 하고. 그 어린 애가 동치미 국물에 밥을 말아서 줘요. 엄마가 집을 비우면 밥상에 밥이랑 동치미를 놓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밖에 나가서 놀다가 배고프지? 하고는, 우리 집에 가자, 그러면서 동치미 국물에다 밥을 말아서 둘이 먹었어요. 그렇게 먹으면 마음이 정말 따뜻해져요. 겨우 일곱, 여덟 살짜리가 그런 마음을 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니 애잔하기도 해요. 그런 게 생각이 나네요.
오수민 :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작가님 작품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박현주 : 제 책을 본 독자들이 가끔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 책에 나오는 어린이들을 보면, 짠하다고 그럴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게 아마 제 속에 있는,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나 제 친구들한테 갖는 감정이지 않을까요? 짠한, 그런 마음.
오수민 : 작가님의 책을 함께 읽으면, 어린이들의 마음을 참 섬세하게 그렸다, 그 마음이 마치 내가 느끼는 마음 같다, 하는 얘기들이 많이 나왔어요. 작가님이 그런 섬세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렇지 않을까, 하고 예상을 했어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질문을 해볼게요. 작가님의 책을 보면, 색을 독특하게 쓰는 것 같아요.
박현주 : 제가 이 책을 그리면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런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니까, 온갖 색깔이 다 들어가는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못 썼어요. 그래서, 책을 못 쓰면, 책을 쓰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그림이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순간에, 색을 빼고 다시 그려봤어요. 그러니까, 아주 시원했어요. 연필이라는 익숙한 재료를 갖고, 그냥 그걸로만 표현하니까, 할 수 있겠더군요, 그때부터.
그러고선 거기다가 조금씩 색을 넣어봤어요. 색을 쓸 때는 제일 중요한 부분에만 포인트를 줬어요. 여자아이가 핑크색 옷을 입고 있잖아요. 강렬하게. 처음에는 빨강색으로 했어요. 그러다 핑크가 너무 좋은 거예요, 괜히. 생전 핑크색 옷을 입지도 않는데. 강렬한 핑크를 넣고 싶었어요. 전 같았으면 빨강색 옷을 입혔을 거예요. 그리고, 뒤에 주인공의 달라진 모습, 용기를 낸 모습일 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죠. 상황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노란색을 썼어요. 처음에는 초록색을 썼어요. 그냥 상투적으로 생각한 거죠. 초록색으로. 동심이나 그런 걸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울리지 않고,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노란색으로 바꿔봤는데, 힘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때 느꼈어요. 아, 노란색이 변화, 변혁, 이런 걸 상징하는구나…. 노란색으로 전체를 그리면서, 앞에, 주인공 여자아이한테 용기를 준 아이, 그 아이한테도 노란색을 입혔죠. 그래서 앞에 있는 준호가 노란색 옷을 입게 됐어요.
오수민 : 색에도 다 이유가 있군요. 이번엔, 작가님이 그림책을 공부하게 된 계기,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박현주 : 제가 원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본격적으로 하던 첫 세대였어요. 한 10년 했어요. 직장 생활을 했던 건 아니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어요. 모임을 같이 하던 친구들하고. 애니메이션은 들이는 시간과 노동력에 비해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조금씩 지쳐갔는데, 그때 애니메이션을 하던 사람들을 모아서 책을 내는 프로젝트가 생겼어요. 그러면서 출판물 일러스트를 하게 됐어요. 그걸 또 한 10년 했어요.
그 무렵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림책에 대해서는 무지했어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갖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면, 읽어주다가 막 졸았어요. 그리고 제가 그림책을 사는 기준도 외국 작가들이 그린 멋진 그림이 있는 것, 그런 정도였어요. 제일 싫어했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살았던 거예요. 옛날이야기가 주는 힘도 모르고. 이야기를 즐기는 법도 몰랐어요. 그런 중에 다른 사람이 쓴 글에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비로소 내 책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그림책이 되게 쉽게 보였어요. 애들이 좋아하는 건 뻔하고, 그런 걸 재미있게 그리면 된다, 그렇게 쉽고 단순하게 생각했죠. 집에서 조그만 그림책을 하나 그려서 출판사에 보내봤어요. 안 됐죠.
그래서, 아이랑 누워서, 책은 읽어주기 싫으니까,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제가 무슨 동물을 키우고 싶다 그러면, 아이는 그건 안 돼, 왜냐면 이런 것 때문이야.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돼, 하는 식으로. 기린을 키울까, 하면, 기린은 천장을 뚫어, 그러고, 그럼, 하마 키울까? 그럼, 하마는 똥 많이 눠서 안 돼, 하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걸 그림책으로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그 이야기로 그림책을 조그맣게 만들었어요.
처음에 그 이야기의 결말은 강아지를 사러 가는 거였어요. 저는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출판사에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뭔가 되게 찜찜했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그림책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한테 보여줄 용기도 안 생기고. 그래서 그걸 서랍에 넣어놨어요. 그러고는 10년 뒤에 꺼내서 다시 만든 책이 《비밀이야》예요.
10년 뒤에 알았어요. 그때 뭐가 문제였는지. 무엇일 거 같으세요? 제 마음에 걸렸던 건, 강아지를 사러 가는 결말이었어요. 이야기의 시작이 “엄마, 나 강아지 키우고 싶어”였는데, 끝에는 “어, 그래, 강아지 쇼핑하러 가자”가 된 거예요, 결말이. 그게 저에게는 뭔지는 몰랐지만 걸렸던 거예요. 그 이야기를 접고, 10년 뒤에 첫 그림책을 낸 뒤에, 다시 이 이야기를 만들 때는 동물 키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아이가 소통하는 이야기로 바꾸었죠.
정말 중요한 건,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와, 그걸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내느냐, 하는 거예요. 아이들이라며 독자를 우습게 보고, 그림책을 엄청 쉽게 생각한 탓에 《나 때문에》를 낼 때도, 몇 번인가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출판사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선생님으로 부르는, 지금도 저한테는 은인이신데, 결정적인 이야기를 한마디 해주셨어요. “이 그림책 안에 있는 인물들의 심리가 뭐예요?” 하고.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이 책을 볼 사람을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그들한테 어떤 이야기, 그림을 내보인다,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 인물들의 심리나 생각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을 안 해 본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엄마, 아빠, 아이들, 그 사람들의 심리나 마음이 어떤 건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완전히 다시 이야기를 만들고 그렸어요. 그러면서 그 이야기 속에 제 이야기를 담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남의 집에서 고양이 버린 이야기를 시간 역순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제가 만든 첫 아이디어였어요. 그걸 보고 선생님은 이게 누구 얘기냐, 본 얘기냐, 당신 얘기냐, 이 안에 있는 인물들의 심리는 뭐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이런 걸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 저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아, 이거, 내가 본 남의 집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그러면, 내가 아는 이야기는 뭐냐, 내 이야기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이는 어린 시절의 나, 엄마는 그 아이를 키우는 나, 그렇게 새롭게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러다 보니 책은 엄청나게 고생하면서 내게 됐죠. 그 전에 제가 생각하던 그림책은, 아이들이 봐서 즐겁고, 짠하게 끝나야 하고,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고,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 제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그 어떤 생각과도 이 그림책은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출판사에서 책을 내준 것만 해도 감사하고, 사람들이 이런 책을 좋아할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죠. 제 이야기라서 더욱이나 내놓기 부끄럽고, 독자들이 읽었다고 하면서 질문을 할까 봐도 두려웠어요.
오수민 :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그림책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작가님의 책 《이까짓 거!》에서 주인공이 “이까짓 거!” 하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힘이 느껴져요. 작가님은 어려울 때, 어떻게 헤쳐나가시는지 궁금합니다.
박현주 : 그 말은, 사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을 썼던 거예요. 저는 제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겁이 많은 것 같아요.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 용기를 못 냈어요. 지금도 저는 운전도, 수영도 못해요. 제가 최근에 했던 용기는 ‘스노우쿨링’이예요. 가족들이 함께 스노우쿨링을 하게 됐는데, 저만 못했어요. 물이 무릎 정도밖에 안 되는데, 잠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본전 생각이 나서, 마지막에 머리를 물속에 넣어봤어요. 세상에, 정말 큰 용기를 냈어요.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나이는 육십이 넘어서. 우리 아이들이랑은 다 잘하는데, 나만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머리를 수면 아래로 넣어봤더니, 그 수면 아래가 너무 고요한 거예요. 그 경험이 너무 신기했어요. 아주 조금 용기를 냈는데, 아, 물속은 이렇게 고요하구나, 자꾸 들어가고 싶어졌어요. 그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그 경험이 제가 낸 가장 최근의 용기예요. 살면서 제가 어떤 일을 벌였을 때, 그게 저의 용기였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화가 났을 때 무슨 일인가를 확 했던 것 같아요. 화가 나면, 그 동력으로 전에 안 하던 일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용기였을까요? 그것보다는, 물속에 머리 담근 게 용기였던 것 같아요.
오수민 : 저도 책을 한 번도 안 쓴 사람이, 여러 권의 책을 쓴다고 다 계약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제대로 쓸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러다 죽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이 책 《이까짓 거!》를 펼쳐보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요.
박현주 : 제가 《이까짓 거!》를 쓸 때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요. 순식간에 썼어요. 그림도 되게 빨리 그렸어요. 3개월 만에 완성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 책에서 복병은, 제목이었어요. 원래 제목은《비 오는 날》이었어요. 글도, 그때의 제 심리를 담아서 쓴 글이라 처연한 느낌이었어요. 나중에, 뒤쪽의 글이 많이 바뀌었어요. 하여튼, 책을 다 끝냈는데, 출판사에서 글을 좀 손봤으면 하는 거예요. 처음에 어떻게 썼냐면, ‘비가 온다. 나는 달린다’ 하면서 비가 온다는 말을 많이 썼어요. 여기서 비는, 저한테 닥친, 크고 작은 시련이었을 것 아니에요? 그럼 이런 시련들은, 사실은, 살면서 계속 오잖아요. 이게 한 번 지나간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도망가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고, 이 시련을 통과해 가겠다, 그런 의지를 담고 있었어요. 비가 와도, 그냥 맞고 가자, 그런. 비가 오지만, 나는 달린다, 그게 저에게는 중요했어요. 출판사에서 이걸 바꾸기를 요구하셔서, 굉장히 서로 안 맞았죠.
그러다가, 출판사 사장님이 《이까짓 거!》라는 제목을 지어서 온 거예요. 사장님은 막 신이 났어요, 제목을 이렇게 짓고 나서. 이렇게 좋은 제목이 없다면서. 그런데, 저는 좀 떨떠름했어요. 사장님이 당황하더군요. 이렇게 좋은 제목인데, 하면서. 결국은 제가 사장님한테 설득을 당했어요. 사장님이 이 제목을 정하면서, 초등학교 선생님들한테 리서치를 하셨대요. 선생님들이 좋아하셨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아주 작은 일도 선생님들한테 와서 자주 고자질을 한대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그까짓 거, 좀 넘겨라, 참아라, 그런 말을 해주고 싶대요. 그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이 제목이 필요하다면서요. 제가 마음을 고쳐먹길 잘했죠.
오수민 : 저도 작가님이 마음을 고쳐먹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어요. 이 제목을 보고 저도 정말 좋아하고 열광했거든요. 그림책 모임에서 나온 질문인데, 준호가 주인공과 끝까지 같이 가지 않고 끝낸 건 무슨 이유 때문인지요?
박현주 : 그건 제게 아주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결국은 나 혼자 해야 하잖아요. 준호는 사실 주인공 아이한테 같이 가자고도 하지 않았고, 자기를 따라오든 안 따라오든 개의치 않았던 친구예요. 준호는 그냥 자기 갈 길을 가는 아이였어요. 주인공 아이는, 준호가, 다른 사람의 우산을 빌려주겠다고 하는 사람과 달리 자기와 처지가 같은 준호를 따라간 거거든요. 그 마음은 이해가 가죠.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누가 나한테 위로를 보내주는 것보다, 나하고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거나 할 때 더 큰 위로가 되잖아요. 그런 마음의 신호를 따라가는 거예요.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같이 갈 수는 없어요. 뭐든지. 혼자서 가야 해요. 그러니까, 당연히 준호는 없어져야 하는 친구예요. 어쨌든 혼자 해야 하는 거예요.
오수민 : 작가님의 의도가 그런 거였군요. 작가님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으시나요? 하는 질문이 있어요.
박현주 : 저는 책을 읽다가, 길을 가다가,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핸드폰에 잔뜩 써 놔요. 그러다 그중에서 결론이 나는 이야기만 글로 써요. 수많은 아이디어를 낼 수는 있어요. 그런데, 결론이 없으면 못써요. 결론이 제 생각인 거예요. 그 이야기에서.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려면, 항상 머리 한 쪽에 담아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다 보면, 풀리지 않았던 것이 풀리기도 해요. 어떤 건 이야기가 안 돼서 없어지기도 하고.
저는, 이건 무엇에 관한 이야기야, 하고 한 줄로 써봐요. 명료하게 해야 하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면 안 돼요. 그림책은 독자층이 넓어요. 저는 아이들이 읽는 책은 두 가지 이야기 구조를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이야기는 명료해야 한다, 그런 생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저 스스로는 다 알고 있어야 해요. 결론까지 이야기를 다 만들고 나서, 그림은 나중에 그려요. 글도 다 쓰고 나서 그림을 그려요. 글이 짧지만, 글 먼저 다 써 놔요. 그림부터 그리는 분도 많으신데, 저는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어요.
오수민 : 창작을 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 필요할 텐데, 그런 에너지는 어디서 얻으시는지.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박현주 : 이게 저의 생업이니까, 생업에서 나오는 에너지겠죠. 첫째는, 그림책이든 그림이든, 이건 제가 생업으로 끌고 가야 하는 거예요. 둘째는, 제 작업으로서 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생각해요. 전 모든 걸 계획하고 나서 해요. MBTI 측면에서, 어떤 연예인은 자신을 ‘BBBB’라고 하던데, 저는 ‘JJJJ’라고 할까요? 계획을 짜놓지 않으면 두려워서 안 돼요. 스트레스는 잘 못 다스려요.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투병하실 때, 그때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어요. 그때 청소를 했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좀 안정됐어요. 그때 알았어요.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청소를 하는구나, 하고요.
오수민 : 작가님이 평소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있다면, 세 가지만 알려주세요.
박현주 :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저는 저한테 없는 걸 좋아하게 되더군요. 좋아하는 단어 한 가지는 ‘유머’예요. 저희 시어머님이 유머 감각이 좋아요. 어떤 상황이든 툭 던지며 웃게 만드는 한마디, 그런 유머 감각이 참 부러워요. 그래서 제 딸들한테도 유머 감각이 있는 남자를 만나라, 그런 얘기를 해요. 또 한 가지는 ‘지금’. 제가 아까 MBTI가 ‘JJJJ’라고 했잖아요. 제가 정신적으로 늘 피곤한 상태인데, 그 이유가, 항상 과거와 미래만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지난 일에 대한 후회, 설거지하면서도 지난 일, 후회됐던 일을 생각해요. 아니면 이따가 해야 할 일, 그런 걸 생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해야 할 일 때문에 지금 하는 설거지가 너무 싫은 거예요. 에이, 이걸 빨리할 수 없나, 안 할 수는 없나, 이런 생각 말이죠. 삶이 참 고단하게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지금, 내가 지금 하는 것, 그것만 생각하면 그렇게 괴롭지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설거지하는 나만 생각하자, 그런 것. 나머지 하나는 ‘용기’. 제가 늘 갖고 싶은 거예요.
오수민 : 작가님이 그림책 작가가 돼서 참 잘됐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나시나요?.
박현주 : 저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이에요.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직장도 다녀본 적이 없고. 하다못해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 없어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이든 작업실이든 안에서만 일했어요. 이 책을 누가 보는지 모르는데, 어쨌든 책이 나가면 독자들이 보고 피드백을 해주고. 정말 감사해요.
《나 때문에》를 내고 나서,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어요. 비평을 감당할 마음도 안 생겼어요. 어떤 분이 직장에서 명예퇴직하고 나서 우울증이 왔다고 해요. 힘들었겠죠. 그 부인이 그림책 모임을 하셨나 봐요. 남편한테 그냥 들으라고 하면서, 《나 때문에》를 읽어줬대요. 그때 그분이 위로를 받고 우셨대요. 그 얘기를 듣고 큰 힘이 났어요. 그림책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걸 알고, 저도 그때부터 그림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정말 위로가 됐어요. 《달구지를 끌고》라는 그림책이 있는데, 그 책은 한 집의 한해살이 얘기예요. 그 책을 보고 참 위로가 됐어요.
오수민 : 작가님이 하시는 일 중에 가장 선호하는 일은 어떤 일이신지요?
박현주 : 그림책을 쓰고 그리는 일이 첫 번 째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아이디어를 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 좋을 텐데, 그러자면 시간이 부족해서 생업에 지장을 줘요. 그래서 두 번째로 제가 하는 일이 동화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요. 그 일은 그렇게 부담이 가는 일은 아니에요. 사실, 좋은 글은 굳이 그림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그림이 오히려 상상력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분이 기획한 그림책에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예요. 기획하시는 분이 만든 세계관에 제가 그림을 넣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오수민 : 후속으로 나오는 작품이 있다면, 언제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요?
박현주 : 출판을 기다리는 책이 있어요. 한 동네 작은 가게 사장님들의 이야기인데, 5월쯤 나올 예정입니다.
오수민 : 이제 시간이 다 돼 가는데, 오늘 참석하신 분들 가운데 추가로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시면 질문 받겠습니다.
참석자1 : 《이까짓 거!》에 보면, 주인공인데, 이름이 없어요. 왜 그런지?
박현주 : 주인공 이름이 없는 이유는, 독자,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주인공으로 알고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름을 짓지 않았어요.
참석자2 : 책 본문에는 《이까짓 거!》라는 제목과 같은 말이 두 번 나와요. 제목이 처음 지은 것과 다르다고 하셨는데, 이 책 본문에 나오는 말을 차용했는지…
박현주 : 네, 그건 아니에요. 제목이 달라지면서 본문 글도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달려야지’ 이렇게 썼어요. 제목을 바꾸면서, ‘이까짓 거!’ 이렇게 바꾸었죠. 말로 할 필요가 있냐, 하는 식으로.
오수민 : 네, 오늘 바쁜 시간 쪼개 나와주시고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신 박현주 작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것으로 박현주 작가님 초청 숭례문학당 북토크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