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사유하다 ― 불교 철학서 두 권 함께 읽기를 마치며


철학의 시선으로 불교를 사유하다


불교 철학서 두 권 함께 읽기를 마치며 



불교철학서 두 권 읽기를 마쳤습니다. 철학의 시선으로 불교에 대해 사색했습니다. 책 읽기를 시작하며 던진 질문, 종교와 철학의 차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거두절미하고 저에게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고 철학은 의심의 영역입니다. 종교만큼 우리에게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게 있을까요? 종교를 철학의 눈으로 살피면 최소한 맹목적 믿음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교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불교 교리에 대해 질문하며 사유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개념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삶의 윤리를 제공하는지 따져보는 일입니다. 그런 태도로 우리는 두 권의 불교철학서를 읽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첫 책, 홍창성 교수의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는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미국 대학생들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입니다. 불교의 핵심개념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논리적으로 파고든 접근이 신선하고 설득력 있었습니다. 두 번째 책, 이진경 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는 불교의 개념들을 화두삼아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를 시도한 책입니다. 불교의 여러 개념들이 현대인의 정신을 자극하는 지적 마중물이 되고 있음을 책은 보여주었습니다. 두 책을 읽으며 저는 고대 인도에서 발흥한 불교가 현대철학의 사유세계와 크게 교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불교의 요체는 자아의 실체성 부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의 실체를 의심하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은 충격 그 자체일 것입니다. ‘란 존재의 실체가 없다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물에 실체가 있다는 생각은 좀 단순하고도 유치한 발상입니다. 2600여 년 전 인도의 붓다가 바로 그 일차원적인 발상의 틀을 깨어버렸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연기론(緣起論)입니다. 연기에 대한 사유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중도(中道)로 이어졌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건 허무의 관념입니다. 이 허무의 감각을 뛰어넘어 고통 없는 삶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한 이가 바로 붓다입니다.

납득하기 어렵겠지만 서양철학이 붓다가 깨달은 무아의 의미를 사유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부터입니다. 탈근대의 삼인방 마르크스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인간의 자아가 굳건한 실상이 아님이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현대의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철학은 자아와 세계의 견고한 본질 같은 것에 더는 기대지 않습니다. 서양철학이 오랫동안 매달렸던 형이상학의 족쇄를 과감히 벗어던져버렸습니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호오(好惡) 등의 이항대립적 사유에서 과감히 탈피할 것을 현대철학은 선언했습니다. 이 모든 사유의 혁신이 붓다 사상과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붓다의 사유를 이어받아 발전해온 불교가 오늘날 서구의 지적 엘리트들에 의해 집중 탐구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의도치 않게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섭렵한 것처럼 오해될까봐 두렵습니다. 저는 단지 두 불교철학서가 제게 일깨워준 사유의 일단을 피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제 자신의 처지에 견주어 크게 와닿은 불교의 개념들을 중심으로 단상을 쓰고자 합니다. 저의 생각이 불교에 대한 단견 내지 오해에 기반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제 자신을 표현합니다. 고백 투의 일기체 형식으로 씁니다.


무아로 살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의 자아는 왜 이다지도 허술하고 나를 잘 지켜주지 못하는지 수없이 좌절하곤 했다.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려고 무수히 노력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초라한 실패와 실망이었다. 50대 초반 어느 날 붓다의 무아가 내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허무에 시달렸던 나를 무아가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회의의 시선으로 맞이한 불교 공부가 조금씩 나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데려갔다. 나의 자아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걸까?

나의 정신과 의식이 무엇에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건 언제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어느 것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아 다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 나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이 나는 단단하지 않고 잠정적일 뿐이다. 그것을 인지하는 지금 나는 두렵지 않고 오히려 자유를 느낀다. 그 어느 것도 나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가볍게 한다. 니체의 아이를 떠올린다. 남은 생 아이처럼 망각의 존재가 되어 늘 새로움과 창조의 바퀴를 돌리며 살다 떠나고자 한다.

 

윤회를 생각하다

나는 윤회라는 말에 늘 의심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 유물론자인 내게 윤회란 황당한 주장처럼 들렸다. 어떻게 무아의 존재인 내가 윤회한단 말인가. 그건 어불성설이다. 죽고 나면 나란 존재는 우주의 원자로 흩어지고 말 터인데. 윤회만큼 불교도를 혼란스럽게 하고 오도하는 개념도 없다. 이것은 붓다가 언급하기 꺼려했던 형이상학의 문제, 즉 인간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붓다가 윤회를 적극적으로 부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윤회라는 개념을 통해 붓다는 우리 존재의 참의미를 깨우쳐주려 노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체로서의 란 존재가 윤회하지 않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무시(無始)이래로 윤회의 바퀴는 돌고 또 돈다. 끊임없이 사물과 생명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 윤회의 시공간에서 지금 내가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이 삶은 어떤 의미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질문만큼 실존적인 물음도 없다. 나는 답한다. ,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한 번으로 족하리. 내 모든 것을 바쳐 이 영원회귀의 운명적 인연을 긍정하고 사랑하리라. 여기 이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무수한 만남을 경험하다가 육신의 호흡이 끊기는 날 안녕, 세계여!” 감사 인사 건네며 홀연히 떠나리라.


중도를 걷다

적극적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기. 그런데 붓다는 여기에 경계심을 보이는 것 같다. 너무 흥분과 열을 내며 살지 말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낸다. 그것은 집착으로 이어져 또 다른 고통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지향한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열반이란 어떤 긍정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열반이란 단지 번뇌와 집착의 불길이 꺼진 상태’, 즉 마음의 평정함을 말할 뿐이다. 고요히 마음 속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아 삶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붓다는 주문한다. 그게 삶의 최고의 경지라고 말한다.

나는 이제 그것의 실천적 강령으로 중도를 떠올린다. 중도, 양극단을 떠난 중간의 선택,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의 요체는 분별의 논리를 떠나는 데 있다.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에 대한 생각을 떠나 세계를 바라보라고 한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 아니 이런 분별의 마음 없이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단 말인가? 붓다가 이를 모를 리 없다. 붓다는 내게 단지 무의식적인 분별의 노예로 살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일상에서의 분별이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잘 지켜보라는 조언이다. 그러려면 마음은 언제나 저 텅 빈 하늘처럼 맑고 고요해야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以生其心). <금강경>에 나오는 이 글귀처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며 살리라.


종교, 철학으로 탐구하기

글을 마치며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에겐 종교에 대한 공부가 필요 없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단지 초월적이며 독선적인 제도권 종교가 제게 맞지 않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 못지않게 저 역시 보다 나은 삶, 행복한 삶을 갈구합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저 하늘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입니다. 저는 그것을 얻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고 종교에 대한 지적 탐구를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견해에 공감하는 선생님들께 믿음이 아닌 이해의 대상으로서 종교를 공부하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철학자 예수와 철학자 붓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7주간 불교철학서 읽기에 동참하신 선생님들께 이번 공부가 보다 나은 삶을 향한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글ㆍ윤영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