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 1칼럼> 3기 후기


"변화의 속도를 맞춰주어야 함께할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안타까운 일들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는 것일까? 그저 속수무책 한탄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동조해주는 편이고, 의견이 다르거나 시비를 걸어온다 싶으면 피해버린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고, 끝까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던 같다. 사실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살아왔지만, 이런 삶이 결코 존경받지는 못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주희 연구원의 글을 보며, 참 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글은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그렇다. 나도 이번 기회에 나 자신을 좀 바꿔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세히 알아야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이다. 열심히 해보자.

<조**>

 

눈 떠 보니 후진국. 세월호 사태 이후, 누군가 말했듯 대한민국이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보호막이 이렇게 허술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는 배나 비행기를 탈 때, 지역 축제에 참여해서 인파에 휩쓸릴 때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이 밀려든다. 최근 횡횡하는 흉기 난동 사건들을 생각하면 시내 중심가를 지나가기도 두렵다. 자유로운 활보가 가능한 공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점에 정부가 특별 치안 활동을 선포하고, 이상 행동자나 흉기 소지 의심자에 대한 검문이나 물리력 동원 등이 강화된다는 것은 일견 안심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강남역에 서 있는 장갑차와 특수 대원들의 사진을 보아도, 마음 한구석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안전해지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저런 것일까? 정부가 정말로 국민의 안녕과 안전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이상 행동들에 대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 연구하고, 방지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은둔, 고립된 이들의 사회적 울분이 무고한 이들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은 분노할 만한 일이지만, 이것을 총검으로 막는다는 것은 번지 수를 잘못 찾은 대처다. 경쟁 일변의 교육이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교육으로 바뀌고, 일자리와 사회 참여의 기회를 넓히고, 사회적인 교류의 물꼬를 트는 등 장기적이며 더 폭넓게 사회 환경을 새로 정비하는 일이 우선일 것이다.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별화 되는 범죄들의 특징은 공포와 분노를 자극하는 것들이다. 너무나 시끄럽게, 반복적으로,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사건들과 이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모습 뒤에는 더 크고, 중대하며 근본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다. 우리의 시선과 행동이 향해야 할 곳이다.

<서**> 

 

고대로부터 권력자는 내부와 외부를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 항상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결속을 다져왔다. 권력자의 한마디에 로마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중세시대의 여성들은, 일본의 조선인들과 제주도의 도민들은 모두 적으로 규정되어 사회의 불안과 동요를 잠재우는 소모품이 되어 버린다. 이는 사회에 잠재된 문제의 근본을 찾아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기에 많은 위정자들이 자주 써먹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효율성 있는 통치수단이다.

하지만 이 정부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우리가 외부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에 눈길이 쏠린 사이, 자신들과 가깝고,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덮고 넘어간다. 너무 대놓고 이루어지는 밑장 빼기에 저것이 과연 밑장 빼기라 부르는 것이 옳은가에 회의감이 들 정도이다. 이렇게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친 이익 집단을 일컽는 전문 용어가 있다. 바로 카르텔 혹은 조폭(깡패)이다.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깡패라던 그 분은 이렇게 자기의 수식어를 하나 늘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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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주어진 한 개인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전에 대한 의무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규정의 문체 속에 사건의 당사자들을 가둬 놓고 국가는 여러차례 다가오는 참사 앞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해버린다. 규정과 처벌 속에 누군가는 서류 뭉치를 책상 한 쪽으로 치워버리는 책임 회피의 수단이 되어버리고 또다른 누군가는 사건 속에 지워지고 잊혀지겠지! 

재난 위에 재난이 덮혀지고 또다른 피해자는 끝없이 양산되고 있다. 안전이라는 단어보다 재난이라는 말머리가 더 가깝다. 채찍과 울부짖음의 목소리는 오로지 피해자가 내는 호흡에 불과할 뿐 그 거리가 가까워질 때쯤 누군가의 귀가 열린다.

한 시민으로서 나의 안전은 그동안 안락스럽게도 보장되어 왔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재해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멀고도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피해를 입은 제3자들을 보며 상실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가지는 건 나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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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양한 '흉기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 아침에 자식, 부모,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가해자들은 명확한 이유 없이 칼을 들고 나와 지나가는 시민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사건이 연이어지며 SNS에 장난으로 살인 예고를 하는 글을 올리는 경우도 생겼다.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권총을 진압에 더 이용하도록 저위험 권총을 지급한다고 하고, 테이저 건을 이용해 강경 진압에 사용한다. 또한 강남역에 장갑차가 출연하기도 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닌 공포감만 조성하여 공권력만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윤석열 정부는 먼저 처벌을 강화했다. 물론 그동안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자는 목소리도 작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처벌을 강화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 될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먼저 보여주기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처벌이 강화 된다고 해서 사건이 발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기 때문에 단순히 처벌이 강화된다고 무서워서 범죄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처벌이 정부의 주관적인 선택에 의해 강화되는 것도 문제이다. 선별적으로 어떠한 집단의 집회나 노조는 더 강력하게 처벌을 한다. 또한 대기업이 관련되어 있으면 처벌의 집행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 계급을 나눠 시민을 규정짓고, 정부의 입맛에 따라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대한민국이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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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등장하는 인공지능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는 기분은 오로지 나뿐인가보다. 사회 또한 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하고 있다. 경쟁자들은 엎치락 뒤치락 있는 힘껏 경주를 다하는 듯이.

누구 하나 끌어내려야만 끝날 것 같은 신경전이 이어지고 너 하나만은 내 뒤만 쫒아와 하며 내심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이라는 꼬리에 꼬리를 이은 말만 들었지 실제 내가 수요자로서 얼마나 자주 이용할지는 모르겠다. AI로부터 쏟아져나오는 뉴스거리들 또한 믿기 어렵고 유투브를 통해 쏟아져나오는 정보들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과거 없던 시절에는 물물교환으로 내 가치를 보전받고 내주기도 하지만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무한히 쏟아져나오는 이미지와 영상을 통해 매일 매일 정보를 취하고 거래가 이루어진다. 거래의 승자는 이제 제대로 된 가치를 가지면 해피할까? 거래에 대한 가치와 보상만을 따지고 수익만 따지는 구조와 현실에 씁쓸함을 거둘 수 없다.

<박**>

 

최근 한국기자협회는 AI 뉴스 데이터 활용이 언론의 저작권법을 해치고 있다며 콘텐츠에 대한 가치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동의하기 쉽지 않다. 예술계, 일러스트레이션 등 인공지능의 침해를 받고 있는 영역의 경우 창작자들의 고유한 사상과 감정, 스타일이 명확하다. 그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기 위한 수련의 기간 역시 가늠이 가능하다. 예술작품의 경우, 그들의 작품을 통해 개인의 창조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목적을 띈다.

반면 뉴스는 그 목적성이 이미 공공성을 띄고 있다. 뉴스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6하 원칙의 틀에 따라 보도하는 사실적 글쓰기이다. 언론사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방향성을 띄고 뉴스를 선별하여 보도하여 대중들을 움직인다. 뉴스의 역할은 사실에 대해 대중들을 이끌고, 진실에 더 다가가도록 돕는 것이다. 언론이 가장 기본적인 역할마저 등한시하며 비판을 받는 현실에서 보상, 가치 인정에만 몰두하는 기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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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보는 미디어의 건강성을 위한다며 ‘AI 가짜 뉴스를 언급하지만 여기서 쓰이는 ‘AI 가짜 뉴스는 칼럼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AI기술로 만들어진 딥페이크 영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본인이 내내 목놓아 성토하고 있는 포털에서 제작 중인 언어 모델의 AI와는 결이 다른 문제다. 근거 자체가 터무니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원작자에 대한 보상과 출처 표기 없이 정보를 가공해 전파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지만 사실 이는 본인들이 늘 해오던 일이다. 이를 가리켜 정준희 교수(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교수)는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이란 신조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편향성을 숨기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남의 발언을 따와 "누가 누가 그랬다더라"라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원하는 편향의 의도만 전달하는 언론의 행태를 말하는 것으로 본인(기자)들은 아무런 취재도 탐사도 확인 전화도 없이 끊임없이 인터넷을 보고 기사를 베껴 쓰며 흙탕물과 같은 기사들을 늘어놓고 있다. (혹자는 넘쳐나는 뉴스에서 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어그로성 제목(알고보니... 충격!!!)을 쓰기도 하고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기사 제목을 쓰기도 하며 혹은 사안에 따라 저번과 전혀 다른 기조의 기사를 쓰기도 한다. 이게 더 나은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은 자들이 벌일 일인가?)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 가져다가 구차하게 늘어놓고 있지만 결국 문제는 돈이다. 제목부터가 노골적으로 ‘...공짜는 없다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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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세상이다. 그림도 소설도 몇 분이면 인공지능이 만들어 준다. '실제로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카톡에 챗gpt를 다운로드 하니 가능했다. 질문만 구체적으로 잘하면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글이 나온다. 또 놀라웠던 점은 내가 원하는 글의 분량을 정하여 요청하면 거기에 맞게 글도 써주는 것이다. 300, 500, 2000... 원하는 대로 글자 수를 맞춰 생성해 주었다. 실험삼아 아주 긴 글의 소설 작성을 요청하니 짧은 글만 가능하다는 답변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의 소설들을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인간의 창작의 영역까지 인공지능이 활용되는 것이다. 실제로 콜라라도 주립 박람회 디지털 부문 1위를 AI 생성 작품이 탔다. 누군가는 단어 몇 개로 조합해서 생성해 낸 이미지라 불합리하다고 하지만, 이것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기술의 발전이 아닐까?

최근 AI가 뉴스 데이터를 활용하는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인터넷 정보 수집으로 2차 가공물을 생성하는 것에 대해 저작권 문제를 걸고 넘어간 것이다. 물론 가치가 있는 전문적 내용에는 저작권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술적인 자료 말이다.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기사를 '가치 인정' 받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이면에는 단순히 '이익'만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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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하고,공기가 필요하고, 먹을 게 필요하다. 이른바 의식주다그럼 그 의식주는 누가 제공하는가? 모두 자연으로부터 온다. 그 자연이 지금 위태롭다. 이 칼럼에서 이제 거대한 투기가 시작되었고, 이어질 거라고 한다. 이 사건이 그 역사적 순간이 되다니. 이렇게 쉽고도 무탈하게...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런데 먼 산 불구경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어느 꼴통보수 노인의 말이 생각난다. “앞으로 이 지구에서 살아갈 청년들을 위해서 환경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라고 했더니 내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염수 방류도 먼 이야기라고 여기는 걸까? 당장 비타민을 섭취해야 할 등푸른 생선도 못 먹고 오메가3는 또 어디서 찾아서 섭취할 것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 내 딸의 먹거리는 도대체 어떡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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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학교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숙제는 보통 개인이 혼자서 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조별 과제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조별 과제의 성공적 이행은 구성원들의 원활한 협력이 필수 조건이지만, 안타깝게도 구성원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무임승차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경우 나머지 구성원들이 몇 배씩 노력하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누군가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기후 위기 문제는 60억 세계인이 함께 수행하는 조별 과제라고. 하지만 이 말을 들은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갑자기 대학 시절의 끔찍했던 순간들이 생각나며 그 끝이 너무나도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기후 위기 문제에서 단숨에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문제를 목도하게 된다. 방사능 오염수가 국가에 의해 바다에 방류된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언젠가 읽었던 호프 자런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나는 강하게 믿는데, (네가) 용기를 내 그 희망을 지켜갈 수 있다면 좋겠다.”(p.232) “희망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하다.(p.234) “게으른 허무주의에 유혹당해서는 안 된다.”(p.235). 

호프 자렌 선생님. 죄송해요. 이제 제게 남은 희망은 언젠가 일본에서 유행하던 고지라(1954년작, 원자폭탄과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의 상징)가 태평양 앞바다에서 튀어나와 일본을, 그리고 인류를 벌해주는 것뿐인가 합니다. 지구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여. 부디 우리를 용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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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었다. 몇 년 전부터 일본에서 오염수 방류를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을 때는 '설마'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20238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바다에 방출되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과학적 실험을 해봐도 바다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50, 100년 후에는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바닷물에 섞이는 오염수로 인해 해양 생태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충격적인 사실은 대한민국 정부도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우리나라지만, 결국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여 눈치를 본 것 이다.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지만, 정부는 모른척하고 있다. 공식적인 투기를 모르척하는 방관자인 정부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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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문제를 한 국가의 자국 위주의 무한이기주의적 행태로만 바라보았던 좁은 시각을 넓혀준 칼럼이었다. 칼럼니스트는 이번 방류로 앞으로의 더 많은 투기의 길이 열렸다고 짚는데, 아찔하며 두려운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한 입으로는 기후 위기에 대해 떠들면서 한 입으로는 오염수 해양 투기를 공식화하고 용인하는 이 국가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당장 자국민의 안전에 대한 우려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환경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왜 못 보거나 못 본 척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일본과 한국, 미국 등 각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윤리와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과오나 불행을 기꺼이 책임지고 어렵지만 그것을 이행해가는 것, 나에게 끼치는 이웃의 무책임한 행위를 강하게 성토하고 거부하는 것이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이 아닌가? 더 크게는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향모를 땋으며>의 저자 로빈 키머러 교수는 선물 경제라는 용어를 들며, 자연의 자원을 무한히 사용 가능한 이용재가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공기와 물을 비롯한 수많은 자연의 자원을 화수분처럼 나오는 자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사라지고 말 선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하고, 상호 의존하며 진실로 책임지려는 자세를 지게 한다고 말한다. 개개인의 양심의 가책에 의한 환경의 보존으로는 미약하기만 하다. 국가여, 바른 방향으로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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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혁명의 본질이 자본과 권력이 주연인 공급자 중심의 발상이라는 전상인 교수의 식견이 매우 날카롭다. 4차산업시대의 핵심인 서비스 산업은 이미 저숙련 저임금 일자리임이 밝혀졌고 이젠 그마저도 인건비 절감을 위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로 인해 정보화 약자인 노년층은 사회 전체에서 소외되고 있다. 자본은 마치 이들을 고객으로서가 아니라, 각종 정보 시스템이나 자동화 프로그램에 과부하를 초래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일종의 버그로 인식하는 것 같다.

노키즈존이란 영유아와 어린이, 또 이들을 동반한 고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업소를 가리키는 신조어이다. 어린이들이 가게의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최근 많은 노키즈존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차별’(더 직접적인 차별은 일전에 다룬 장애인의 이동권이 예가 될 것이다)인지 업소 주인의 권리인지 사회적 논쟁이 제법 뜨겁다. 어쩌면 디지털 시대로의 강제적인 전환은 사회 전체에 노올드존을 설정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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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보다는 라디오에, 전자책보다는 종이로 찍힌 활자에 익숙한 나는 분명 이 정보화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있다. 혼란스럽게 다가온 이 시점에 어느샌가 스마트 기기에 익숙해질 때 즈음 새로운 미디어는 끊임없이 등장하고 유혹하는 손길을 마다할 수가 없다. 네온사인처럼 화려하게 등장한 이곳의 끝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정보의 수와 양은 실로 상당하다. 질적 수준으로만 본다면 나의 두뇌를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처럼 만들 수 있는 수준 높고 우수한 것으로 가득하지만 실상 이러한 정보를 이용하는 다수의 사람에게는 역부족이다. 파도와 같이 겹겹이 쏟아지는 정보의 양이 디지털기기에 의존되고 익숙한 이 시대의 흐름은 찬란하게도 빛나고 있지만 서두르지 말자.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 것처럼 꽉 막혀있는 길이 뚫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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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디지털화 되고 있다. 얼마전 새로 생긴 직화구이 낙지집을 가보니 테이블에 있는 태블릿으로 손님이 직접 터치를 하여 주문을 하게 되어 있었다. 곧이어 태블릿 옆의 카드 리더기를 이용하여 셀프로 결제까지 하였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로봇이 테이블로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리는 직접 음식을 테이블로 옮긴 후 로봇 화면에 있는 '돌아가기'버튼을 누른다. 이러한 시스템의 음식점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 또한 온라인이나 키오스크 등을 이용해서 영화, 기차표, 항공권 등을 예매하는 것은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직원을 직접 만나 대화를 하며 구매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무인 주차장, 온라인 뱅킹 등...

이러한 변화가 처음 시작될 때 많은 사람이 당황하며 더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여전히 힘들어 하는 세대가 있다. 바로 노년층이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배우려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려 한다고 한다. 또한 자꾸 남에게 의존하려고만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조금 더 편리한 쪽으로 바뀌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비용과 효율만을 따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기존의 방식을 모두 없애며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발 맞추어 갈 수 있도록 변화의 속도를 맞춰 주어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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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참 다양한 이름의 열풍들이 불었었다. 부동산 열풍, 코인 열풍, 영재 교육 열풍, 코딩 교육 열풍, 인공지능 열풍 등등... ‘열풍이란 단어는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그 흐름에 탑승하라고 부추긴다. 지체하면 뒤처진다고. 그래서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열풍이 부는지를 골똘히 생각해보거나, 내게 필요하지 않으므로 내가 거부하겠다는 판단을 할 여유도 없이, 열풍 앞에서는 모두들 조급하고 불안하게 탑승하게만 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전 국민 인공지능 일상화시대에 대한 약속은 디지털과 인공지능 만능의 열풍의 도래를 의미한다. 정보화 시대의 역행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국민이 반드시 이에 강제적으로 편승해야만 하는 걸까? 디지털 시대의 변화는 어제와 오늘의 변화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급진적이다. 젊은층이라도 할지라도 새로운 기술 앞에서 충격과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정보화에 능숙하지 않은 중장년, 노년층이 느끼는 단차는 얼마나 큰 것일까. 사회가 더 좋은 쪽으로 변화를 위한 목적을 잊지 않으려면, 그래서 모든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정보화에 어려움을 겪는 층들을 위한 속도와 배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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