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하고 치열한 포크너 글쓰기에 놀란 시간들
<팔월의 빛>은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의 가장 환한 빛으로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 그 아래 드러난 생의 어둠과 희망을 오래 응시하는 작품입니다. 1932년 출간작인 <팔월의 빛>은 <소리와 분노>(1929), <압살롬, 압살롬!>(1936)과 함께 포크너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로, 포크너 문학의 주요 배경인 가상의 공간 요크나파토파 제퍼슨 시에서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던 1930년대 초 8월의 약 11일간의 이야기입니다.
화자와 대상을 교체하며 두 세대 이상을 거슬러 오를 때 열흘 남짓한 소설 속 시간은 급속히 확장됩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그대로의 나는 실존하지 않습니다. 피(혈통), 드러난 외형, 환영, 주의, 신념 등 갖가지 틀로 결박하고 강제하니 태어나면서부터(하이타워 목사의 경우 그 이전부터라는 착오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거나 탈출 여정에 오릅니다. 독자도 숨이 턱에 차는 기분입니다.
조 크리스마스에게 가장 두드러지나 조애나 버든과 하이타워 목사도 자기 의지와 무관한 삶의 조건을 수용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갈 일말의 희망이나 꿈을 차단당합니다. 애초에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시작하는 생은 얼마나 파괴적이고 참혹할 수 있는지 작가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어떻게 분열되는가, 어떻게 더 이상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될 수 있나를 번호 매기듯이 예를 듭니다. 조 크리스마스를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소설 속 빌런들은 활자 안에 갇히는 법 없이 여전히 위협적입니다. 퍼시 그림까지 악당의 층위를 엿보게 하네요.
서늘한 서사 가운데 리나 글로브, 바이런 번치 같은 인물은 빛과 함께 온기를 전합니다. 작가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기도 한 전체 서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리나 글로브에게 할애함으로 잔인한 날카로움을 감쌉니다. <소리와 분노> 등 이전 작품을 연상케 만드는 이미지와 공감각적 표현은 포크너 애독자에게 반가움을 선사합니다. 참담한 중에도 시적인 묘사는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독자를 멈춰 세웁니다. 한 방울의 법칙을 비롯하여 이성을 마비시키는 극단주의, 인간의 위선과 폭력성을 조 크리스마스의 예에서 고발한 작가는 4년 후 <압살롬, 압살롬!>의 찰스 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냅니다.
소설의 부제를 ‘길 위에서’라고 붙여봅니다. 많은 인물이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얕보고 원망하며 자신과 불화했으며, 그 길 위에서 방황하고, 30년을 헤맨 끝에 길을 찾기도 하지만 너무 늦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방향도 없이 길 위를 무작정 달리던 이, 먼지 날리는 길에서도 기꺼이 미소짓는 이들 역시 보았습니다. 치밀하고 치열한 포크너식 글쓰기는 예상했던 대로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계속해서 질문하네요. ‘부조리한가? 그게 다인가? 이제 끝인가?’라고.
더 이상 집필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작품들이라는 사실로 위안 삼습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은 모든 계절 아닐까요?
함께 읽고 생각하고 지금의 우리를 힘껏 들여다보고 나눠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운영자 김은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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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힘들지만, 독자의 능동적 도전 의식 자극하는 매운맛
첫 번째 장에서 “길을 떠난 지 4주밖에 안 됐는데 벌써 제퍼슨에 와 있다니. 세상에. 사람은 돌아다니기 마련인가 봐”라고 혼잣말을 뱉었던 리나는 마지막 장에서 “어머나. 세상에. 사람은 돌아다니기 마련인가 봐요. 앨라배마를 떠난 지 두 달도 채 안 됐는데, 지금 벌써 테네시 주에 와 있다니 말이에요”라고 한다. 수미일관의 끝맺음이다. 두 달 사이에 루커스 버치(브라운), 크리스마스, 바이런 번치, 버든 양, 하이타워 목사, 매키천 부부, 웨이트리스, 크리스마스 조부모, 그림 같은 인물들의 사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일어나 두 건의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지만, 세상사에 달관한 것 같은 리나에게는 그저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는 일일 뿐이다. 어쩌면 작가의 일이란 게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은 돌아다니기 마련이라는 리나의 말이 포크너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다.
이윤성 번역자가 작가 포크너와 가상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풀어쓴 해설을 통해 <팔월의 빛>을 읽으며 힘들어했던 느낌들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친절하게 정리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가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풀어가니 의식의 흐름을 명확히 이해하기 힘들고 내용이 모호하며, 시간의 흐름도 왔다갔다하여 혼란스러웠던 것이 작가의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독자는 작가가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는 편한 독서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건을 정리하고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적극적인 독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포크너의 작품은 읽기 힘들지만 능동적인 독자의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매운맛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한결같이 고립되고 왜곡된 자아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안톤 체홉의 작품들의 캐릭터가 소외되고 진정한 소통을 이루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고통 속에서도 성장하고, 갈등을 극복해 화해하는 전통적인 따뜻한 서사를 그의 작품에서 기대할 수는 없다.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이자 총아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 오**
〇 크리스마스의 할머니의 한마디!(p.564) : “단 하루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을 뿐이에요··· 사람들이 단 하루만이라도 그 아이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없는 것처럼요… 단 하루만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 할머니의 단 하루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〇 브라운과 아이를 낳은 리나를 만나게 해주려고 보좌관과 그가 걸어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바이런의 한마디!(p.618) : ‘이제 난 갈 수 있어. 이제 난 떠날 수 있어’ 그는 노새에 올라타 길 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은 언덕 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 저 정도 언덕은 문제없어. 언덕쯤이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지.’
→ 바이런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바이런은 브라운이란 인물과 리나의 재회를 돕고 노새를 타고 가면서 그녀 곁을 떠나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 심적으로 얼마나 힘드는지 말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잘 모를 때가 많고 하찮게 생각하며 살지만, 그것을 평생 갈망했던 사람에겐 그것이 늘 닿을 수 없는 달처럼 귀중하기 때문에 쉽게 리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바이런이 안쓰러웠습니다.
〇 리나와 재회한 브라운의 비겁한 한마디(p.632) : “밖에서 남자가 지키고 있어. 문 앞에서 말이야. 날 기다리고 있지.”
→ 리나와 브라운의 재회 장면에서는 서로에게서 조금이라도 진실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어떤 이유든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상대를 아프게 하지 말고 할 건 하고 말 건 마는 끝점에서의 당당함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〇 바이런과 브라운의 격투 후 바이런의 속마음!(p.644) : 기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마주 본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마치 서로 다른 궤도를 달리고 있던 유령이나 망령 같은 인상을 남기며 스치고 지나간다. …. 바이런의 몸이 리나가 머무는 오두막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생각이 오두막 문 앞에 먼저 당도해 자신을 기다리는 형국 같다. …난 그 문 앞에 서서 반드시…. 그래도 난 꼭 하고 말거야. 그녀를 꼭 볼 거야.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 책의 시작이 리나가 걷는 풍경에서 시작되어서인지 기차가 엇갈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이 장면에서 운명이 하나는 기차를 태우고 하나는 남기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가족이든 친한 친구든 같이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각자의 궤도를 돌며 삽니다. 어쩌다 한번씩 친밀함을 드러내며 우리는 상대의 궤도를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절대 타인의 궤도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자와 아들을 내버리고 도망가는 쪽의 운명과 자기 자식이 아니고 사랑의 짝도 아닌 여자 쪽에 남는 운명. 두 남자의 운명이 엇갈리는 장면을 느껴보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점점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하면 잘 된다는 것보다는 운명론적으로 그리 되게 되어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 쪽으로 기웁니다. 브라운은 브라운의 운명대로 바이런은 바이런의 운명대로 갔을 뿐인 거 아닌가하는.... 말이 참 미묘하고 아쉽네요. 어려운 책을 샘들하고 끝까지 읽어내서 기쁩니다. 샘들이 나눠주셔서 가능했어요. 감사합니다.
― 하**
조 크리스마스가 버든 양과 함께 지내는 부분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는 마치 두 명의 여자와 함께 지내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두 개의 인격이 있다는 설명보다 그가 세상을 그렇게 나누어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는다. 모든 것이 둘로 나뉘어 보이는 그의 시선은, 지금의 세계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그래서인지, 그에게 관계는 언제나 하나의 온전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윌리엄 포크너가 자주 보여주는 인간의 복잡한 면모가 이 장면에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부엌문이 잠겨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문이 열려 있는 것이 오히려 모욕으로 느껴졌다는 문장에서 나는 그가 이미 배제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들어갈 수 있음보다, 들어갈 수 없음이 더 자연스러워진 상태. 거부당하지 않았을 때조차, 그는 스스로를 거부된 자리로 되돌린다.
“이게 다 검둥이 먹으라고 차린 음식이란 말이지.”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쉽게 지나가지 못했다. 그가 미워하는 것이 타인인지, 자신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분노는 분명한데, 그 방향은 끝내 고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제 시선보다 더 강한, 이미 내면화된 감시. 그는 누군가에게 들켜서가 아니라, 늘 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긴장 속에 머문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조 크리스마스의 분열이 병이 아니라, 세상을 견디기 위해 형성된 하나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은, 요즘의 MBTI처럼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대상이 아니라, 한 지점에 오래 머물며 조용히 바라보아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고.
<팔월의 빛>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관점을 다르게 보게 되어서 매우 즐거웠습니다 .
―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