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한국어》 작가 ‘문지혁과의 만남’ 주요 내용


북토크 ─ 《중급 한국어작가 문지혁과의 만남주요 내용


쓰고, 읽고, 고친다 되풀이만이 삶이다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만들어진다

 

 


숭례문학당이 지난 87, 소설 중급 한국어를 쓴 문지혁 작가를 초대해 한여름 밤의 북토크를 열었습니다. 학당 8층 북라운지에서 저녁 730분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모임은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나와 글쓰기에 관한 평소의 관심사를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문지혁 작가는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등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등을 써냈습니다.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등 번역서도 낸 문 작가는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숭례문학당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민영 작가의 사회로 문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 25명이 함께한 이날 북토크 주요 내용을 간략히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

 



김민영 : 폭염과 재난 속에서 보내는 이 난감한 여름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오늘은 글쓰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귀한 손님, 문지혁 작가를 모셨습니다. 작가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방학이어서 조금 여유가 나시는지?


문지혁 :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너희들은 방학이 있잖아, 하고 부러워하시기도 하는데, 사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할 일들을 방학 때로 다 미뤄놓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방학 때 일이 더 많아요. 저도 방학을 시작하면서 미뤄뒀던 일들, 원고 쓰기나 강연 일정 등으로 좀 바쁘게 지내는 편입니다.


김민영 : 중급 한국어이야기부터 하죠. 이 작품을 쓴 배경이 궁금합니다.


문지혁 : 이 소설은 제가 앞서 쓴 초급 한국어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초급 한국어는 썩 유쾌한 상황에서 쓴 작품이 아니에요. 그 당시 제가 작가로 데뷔한 지 10년 차 정도 됐는데, 소설을 그만 쓰고 싶어졌어요. 작품을 아무리 써도 뭔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고, 그래서 독자들과도 잘 만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간 장르소설을 많이 써왔기 때문인지 문단에서 비평 대상에 잘 오르지도 못하는 것 같았죠. 작품을 계속 쓰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는 좋은 소설이 많은데, 나 같은 하찮은 작가가 나무에 미안한 일을 하면서 책을 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었어요.


게다가 그때 마침 제가 강의를 많이 맡았어요. 한 학기에 아홉 개씩 했으니까. 강의하는 것도 벅찬데 작품까지 쓰려니 힘들다, 그만 쓰자,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억울했어요. 10년을, 데뷔 전까지 치면 근 20년을 썼는데. 그러면 이제까지 쓰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써 보자, 하고 생각해서 짧은 시간에 작품 하나를 썼어요. 2019년 여름이었는데, 그게 초급 한국어예요. 그 소설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아니지만, 관심 가져주신 분들 덕분에 출판사에서 속편을 제안해 주셨어요. 그만두려던 차에 썼던 건데, 아이러니죠. 그 작품 때문에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그 후 중급 한국어를 썼고요.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초급 한국어에 흐르는 정서는 굉장히 비관적입니다. 이 소설은 단어를 잃어버리는 과정을 썼어요. 반면, 다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쓴 중급 한국어는 단어를 얻는 과정을 담았어요. 두 소설이 서로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태어난 배경은 그렇게 서로 달라요.


김민영 : 이 소설은 도입부에 자서전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그중에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자기가, 삶을, 쓰는 것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문지혁 :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이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라는 생각은 제가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 오랫동안 갖고 있던 생각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많은 작가나 비평가들이 비슷하게 했던 얘기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제가 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첫 시간에 다루는 주제가 자서전이에요.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여러 부분은 제가 수업에서 사용하는 강의 노트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하나는 일종의 자기 선언이라고 할까요? 이제부터 나는 내 인생을 쓸 거다, 그렇지만 이것이 소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쓰는 모든 이야기는 어차피 변용된 자서전, 수정된 자서전이니까, 그걸 소설로 풀어보겠다, 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이 소설을 읽는 분들에게 특별할 것 없는 라는 사람이 쓰는 자서전 형식도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쓰일 가치가 있다, 혹은 씌어봄 직하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제가 읽어 본, 제 책과 관련된 리뷰 중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 이 책은 이상하게 읽고 있으면 쓰고 싶어진다라는 거였어요. 여러 독자 분들이 비슷한 리뷰를 써 주셨는데, 저의 마음이 전달된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김민영 : 그러면 소설에서 작가의 실제와는 어느 정도 가까이 있는지요.


사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어디까지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아니냐, 하는 것이에요. 혹시 이건 진짜 다 사실이 아니냐, 그런 질문. 그런데, 이 소설은 저랑 상관이 없는, 꾸며낸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구는 제가 좋아하는 도시이긴 하지만 저와 연고가 없어요. 창작이죠. 흥미로운 건 제가 완전히 지어낸 부분은 진짜라고 생각하고, 진짜 있었던 일을 섞어놓은 건 꾸며서 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김민영 : 왜 그런 것 같아요?


문지혁 : 작품을 소설로 읽느냐, 아니면 자서전으로 읽느냐의 차이 같아요. 만약 이걸 자전적 소설 혹은 논픽션으로 읽는다면 이 이야기가 말이 되느냐, 재미가 있느냐, 하는 측면에서 집중해요. 그러면 그게 진짜냐, 아니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의 이름과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같아서 자서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초급 한국어를 쓰고 나서 저의 실제를 알려드렸어요. 제 어머니는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저는 여동생이 없습니다, 하고요. 자서전이 있고, 자서전적 소설이 있고, 오토픽션(autofiction)이 있어요. 오토픽션의 특징은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게 해서 기능하는 소설이에요. 어디까지가 진짜고 가짜인지 가늠하는 과정 그 자체에 읽는 즐거움이 있어요.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저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분들은 소설 속 내용이 다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고, 저에 대해 실제로 많이 아는 분들은 왜 이렇게 거짓말을 써놨니, 하고 말해요. 이 소설은 그 사이 어디쯤 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김민영 : 소설에는 아이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 현실에서 아이가 태어난 이전과 이후 작가로서 작업하는 데 변화가 있었겠지요?


문지혁 : 아이를 낳고 키워본 분들이라면 이해하시겠지만, 굉장히 커다란 일이에요.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아이의 탄생이 무서운 건, 되돌릴 수 없다는 거예요. , 아이는 조금도 멈춰주지 않아요. 초급 한국어에서 시간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이가 태어나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에요. 이전과 이후가 나뉘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변곡점 혹은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 거죠. 초급 한국어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날 둘째가 태어났어요. 하나일 때와 또 크게 다르더군요. 1에서 2가 되는 게 아니라 10쯤 되는. 그 아이들로 인해서 작업에 방해받는 일들은 많아졌죠. 아이들이 자기 전에는 작업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그런 제약들 말이죠. 그런 점들이 어려운 점이긴 하지만, 제 인생을 좀 더 풍부하게 하는 점들이기도 합니다.


김민영 : 작업은 주로 언제 하세요?


문지혁 : 학기 중에는 수업 때문에 낮 동안은 다른 일을 못 해요. 집에 오면 저녁인데, 아이들이 잘 때까지는 작업을 못 하죠. 게다가 아이들이 저를 닮아 일찍 안 자요. 11시가 넘어야 자요.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 12시부터 작업을 시작하는데, 원래 정해놓은 작업 시간은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예요.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 일은 많아지고 시간은 줄어드니까, 아침 6시까지 작업 시간이 늘어나더군요. 해가 뜨고 나서야 자게 돼요. 이걸 반복하다 보니 체력 소모가 많아요. 최근 컨디션이 안 좋아진 이유도 아마 이것 때문인 것 같고.


김민영 : 어떻게 버티시나요?


문지혁 : 그러니까요. (웃음) 중간중간 쪽잠을 자기도 하는데, 어려움이 많죠.

 

매력을 느끼는 소설들은 시간을 견뎌낸 작품들

 



김민영 : 유튜브도 하시는데, 책을 많이 소개해 주시고. 주로 어떤 책을 선정하시나요?


문지혁 : 제가 좋아하는 책들이죠. 제가 소개하는 책들은 제가 그동안 받아온 문학교육의 연장선에 있어요. 그래서 영미문학이 많아요. 제가 매력을 느끼는 소설들은 시간을 견뎌낸 작품들이에요. 우리가 고전이라고 말하는 작품들. 요즘 나오는 소설에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시간을 견뎌낸 것들에 더 흥미를 느껴서 그래요. 저도 그런 작품을 쓰고 싶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시간을 견디는 작품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해요. 한때는 엄청나게 인기를 끌다 10년이나 20년 지나서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기보다는, 당장은 많은 관심을 받지 않더라도 혹은 뒤늦게 주목을 받더라도 시간을 견디는 소설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뜻에서 책도 그런 기준으로 선정합니다.


김민영 : 영상에서 책을 펴낸 수익을 소개해 주신 적이 있어요. 인세, 번역료, 이런 걸 다 보여주시면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하셨는데 소개 배경이 궁금해요.


문지혁 : 아마, 그 영상이 순기능이 있다면, 작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드리는 경고표지판 같은 역할이지 아닐까 싶어요. 제 기억으로는 2020년쯤 올린 것 같아요. 그때 아마 결산 금액이 천만 원이 안 됐을 거예요. 그때 작업 결산, 수익 결산 두 개를 올렸어요. 작업 결산보다 수익 결산에 훨씬 더 많은 분이 관심을 기울이더군요. 그 영상을 올리고 나서 네가 이렇게 어렵게 사는지 몰랐다며 염려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제 딴에는 재미 삼아 만들어본 건데, 다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더군요.


어떤 일이나 직업을 수치화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봤어요. 연봉 얼마, 월급 얼마, 하는 식으로. 일이나 직업을 이렇게 수치화로만 얘기하는 건 위험해요. , 그 반대편에서 신비화당하는 것도 위험하죠. 예를 들면 예술가 같은 분들. 작가가 원고료를 물어보면, 작가인데 돈을 먼저 생각하는 거야? 하는 반응이 있어요. 작가를 신비화시키는 거죠. 일이나 직업을 수치화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신비화하는 것도 위험해요. 그런 의미에서 반대의 접근을 해본 거예요. 신비화됐던 직업이 수치화됐을 때, 이게 얼마짜리 직업이 될 수 있는가, 그건 단순히 소설가가 얼마나 벌지, 라고 궁금해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저 자신한테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메타 인지, 즉 자기객관화예요. 자본주의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 한가운데서, 제가 과연 얼마만큼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느냐, 그걸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는 역사 속에서 늘 돈과 싸워왔어요. 이런 농담이 있어요. ‘은행가들이 모이면 예술을 논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을 얘기한다. 실제로도 그래요. 작가들이 모이면 거기는 원고료가 얼마고, 저기는 지원금이 얼마 나오고, 이런 얘기를 늘 하게 되는데, 자신한테 가장 결핍된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술은 고귀하니까 돈을 이야기해서는 안 돼, 이런 분위기는 위험하다, 하는 뜻에서 경제적 부가가치는 조금 더, 여러 사람에 의해 투명하게 공개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김민영 : 소설에서 일단 아무 거나 쓰고, 그걸 소설이라고 우기세요라는 문장이 나와요. 그런데, 정말 아무 거나 쓰고 소설이라고 우겨도 될까요?


문지혁 : 됩니다. 다만, ‘좋은소설은 아닐 수 있어요. 소설이란 장르는 품이 넓은 장르예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서도 굉장히 젊은 장르고요. 기껏해야 400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소설은 앞으로도 더 많이 자라나고 발전될 가능성이 높아요, 제가 보기에는. 저는 소설이라는 좌표계가 굉장히 넓어지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이미 몇 세기 동안 축적한,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요.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 이건 소설이지, 이건 소설이 아니지, 이렇게 구분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든 글은 소설 안에서, 소설의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어요. 그런 방법들을 우리가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다만, 아무 거나 쓰고 소설이라고 우길 수는 있지만, 그걸 좋은 소설이라고 우기면 곤란해요. 우리가 축구공을 차면서 축구선수라고 우길 수는 있겠지만, 국가대표로 뽑아달라고 하면 곤란하겠죠. 그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하면 메꿀 수 있을까 고민해 보면 좋겠어요.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어요. 어떤 분들은 자기가 세워놓은 소설의 허들이 너무 높아서 뭘 써도 아, 이건 소설이 아니야, 하시는 분들이 있고, 어떤 분들은 진짜 아무 거나 쓰고 소설이라고, 진짜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둘 다 위험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표현하는 건 자유인데, 거기에서 좋은 소설이 되는 걸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하는 취지로, 실제로 제 수업에서도 그렇게 얘기한 겁니다.


김민영 : 글을 보면 에세이 같은데, 소설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문지혁 : 에세이라는 장르는 굉장히 넓은 분야예요.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논픽션이죠. 실제로 있었던 일을 말하는. 픽션이 있고, 논픽션이 있잖아요. 논픽션의 세계에서 픽션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좀 있어 보이는 말로 픽셔널라이제이션(fictionalization), 허구화의 과정을 거쳐야 해요. 에세이를 썼는데 소설이라고 우기는 건, 이 허구의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이걸 통과해야 좋은 소설이 될 텐데, 이걸 기술적으로 말씀드리면 장르화가 되어야 하는 거죠. 에세이에서는 자기 얘기를 해요. 이걸로 허구화 과정을 거치려면, 보여주기가 되어야 해요. 한 발 뒤로 물러서야 하죠. 에세이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면, 우리는 에세이처럼 써도 소설처럼 쓸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김민영 : 잘 쓰는 것만큼 꾸준히 쓰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매일 조금씩 쓰기, 여기에 대해서는 작가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문지혁 : 사는 것이 쓰는 것과 비슷하고, 쓰는 것도 사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해도, 하루에 다 살 수가 없잖아요. 인생을 한 번에 다 살 수 없는 것처럼 쓰는 것도 한 번에 다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인생과 글쓰기는 굉장히 닮아 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우리가 좋은 사람으로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조금씩 성실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건 하루에 한 장씩 글을 써서 쌓아올리는 것과 같아요.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것들도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의 글쓰기도 하루에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다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글쓰기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를 위해선 평소 영감의 냉장고꽉 채워 둬야

 



김민영 : 소설에서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인용하면서 우리의 일기는 일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무엇에 관한 일기여야만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일기가 일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건 어떤 의미로 쓰신 건지요?


문지혁 : 많은 분이 글쓰기를 시작하고자 할 때 일기를 써보자고 해요. 그런데, 일기라는 건 오래 지속하기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일상을 그냥 적고 기록하거나 중구난방의 이야기들로만 남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말씀드리는 저널은, 책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초점이 맞춰진 일기를 쓰자는 거예요. 초점이 맞춰진 일기를 썼을 때 가장 좋은 점은, 내 안에 있는 영감의 냉장고를 채워 넣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글을 쓰려고 할 때, 내가 저널을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쓰고 싶을 수도 있겠고, 시나 에세이 등 다른 글들을 쓰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글을 쓰려고 할 때, 당장 무()에서 유()가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요리 프로그램을 생각해 보면 쉬워요. 유명 셰프가 나와서 5분 만에 뚝딱 요리를 해내잖아요. 냉장고에 재료가 다 있기 때문이에요. 재료가 다 있으니까 금방 해낼 수가 있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결국은 이와 비슷해요. 우리가 글을 쓰려고 할 때, 즉 지금 무슨 요리를 만들어야 할 때, 일단 시장부터 가야 해요. 재료를 사러. 그런데, 시장 갔다 오면 딴생각이 들고, 지쳐요. 그러면 아, 그냥 시켜 먹자, 이렇게 돼요. 이 얘긴 뭐냐면, 우리가 뭔가를 만들려고 할 때, 냉장고를 열면 신선한 재료들이 가득 세팅되어 들어 있다면, 우리는 그걸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어요. 저널을 쓴다는 의미는, 저널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에 이어질 진짜 글쓰기, 우리가 바라는 글쓰기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영감(靈感)의 냉장고가 꽉 채워져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예요. 영감을 얻으려 시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요리법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냉장고를 열면 거기 필요한 재료들이 가득 들어 있고, 그것들을 잘 조합해서 쉽게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숙달된 글쓰기, 프로페셔널한 글쓰기를 위해서예요. 어떤 요리를 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라면, 일단은 다양한 재료를 마련해 놓는 게 중요하겠죠. 그리고 늘 쓰이는 재료들을 많이 넣어두면 좋겠죠. 그런 생각으로 저널을 쓰면 좋겠다, 하고 얘기한 겁니다.


김민영 : 얼마 전에 <크리스마스 캐러셀>이라고, 선생님 단편소설 한 편이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좀 특이했습니다.


문지혁 : 책이 얇고 작아서 놀라신 분들도 있을 텐데, 출판사에서 단편소설들을 한 편씩 한 권의 책으로 펴내는 기획으로 나온 거예요. 요즘 사람들이 책과 너무 많이 멀어져서 한 권 분량을 다 읽기 힘들어하고, 그래서 단편 분량의 완결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전달하고자 하는 기획입니다. 저는 제가 계속 쓰고 있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 이야기를 썼습니다. 내용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미국에 놀러간 어느 청년이 고모네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 올랜도라는 도시의 디즈니월드에 놀러 갔다가 사촌 아이를 잃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놀이공원이라는 공간, 회전목마라는 놀이기구에 대해 생각해본 소설이에요. 우리가 흔히 인생을 회전목마에 비유하잖아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그런데 저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정말 우리의 삶이 회전목마일까? 우리가 타는 말은 죽은 말일까? 우리는 늘 제자리에 맴돌 수밖에 없는 걸까? 이런 식의 메타포가 우리의 삶을 좀 초라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우리가 타고 있는 말이 진짜 살아 있는 말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거기서 내려 초원을 향해 달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나누고 싶었어요.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소위 동반자살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자살 부부 가족 사례라고 불러야 하는, 그 이슈와 묶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봤습니다.


김민영 : 장편소설을 쓰는 문지혁과 단편소설을 쓰는 문지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문지혁 : 단편과 장편은 전혀 다른 종목이에요. 문학사적 전통에서 보면 소설은 장편입니다. ‘Novel’‘Novella’에서 나왔는데, 장편과 중편을 가리킵니다. 단편은 ‘Short Story’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소설가, ‘Novelist’는 장편소설을 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서구에서는 단편만 쓰는 사람을 좀 예외적인 작가로 분류해요. 우리나라와는 반대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단편문학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근대화와 비슷하게 진행됐습니다. 왜 우리가 영미문학을 많이 읽느냐 하면, 단순하게 말해서 그쪽이 근대화를 많이 했기 때문이에요. 근대화와 함께 발전해간 장르죠. 한국문학은 제가 볼 때 단편은 서구문학을 거의 다 따라잡았고, 능가하는 부분도 있어요. 다만, 장편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장편소설은 토양이 좀 덜 개발된 측면이 있어요. 저도 단편을 쓸 때는 좀 더 문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쓰려고 합니다. 단편은 낭비되는 게 없어야 하거든요. 비유하자면 100미터 달리기 같은 거예요. 전력을 다해 뛰고 끝나야 하거든요. 10초면 끝나잖아요. 그 안에 다 쏟아부어야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신경 써서, 기교적으로도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까 고민합니다. 대신, 장편은 아직 우리가 못해본 것들이 많기 때문에 조금 더 편안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다양하게 하려고 합니다. 저는 두 장르 다 매력이 있지만, 길게 보면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렵지만 이 부분에 더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김민영 : 참석해 주신 독자들의 질문으로 넘겨보겠습니다.


독자1 : 소설에는 질문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질문은 어떤 것인지요?


문지혁 : 제가 강의를 하면 질문을 많이 해요. 수강자들이 낸 강의평가 자료가 있는데, 거기에 질문만 안 하면 그럭저럭 괜찮은데, 질문이 너무 많아 싫었다고 써놨더군요.


저는 질문하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중요해요. 좋지 않은 질문은 답이 너무 쉽게 나오는 질문이에요. 그럼, 어떤 질문이 좋은 질문일까요? 사람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질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모두가 똑같은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인생이 뭐예요? 이런 질문은 좋은 질문이죠. 듣는 사람마다 인생은 이런 거야, 하고 다 다른 생각과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면, 그런 질문과 답이 좋은 쌍이라는 생각이죠. 궁극적으로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 카프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와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쓰신 분도 있잖아요. ‘악스트(Axt)’라는 문학잡지도 있고.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가치 중의 하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굳건하다고 생각했던 내 내면의 바다, 그 얼어붙은 바다가 깨지는 경험을 해주는 것, 그래서 저는 질문 자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독자2 : 소설이 픽션이라고 하지만 역사와 같은 큰 스토리 라인은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소설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작가의 현실 세계 또한 그대로 녹아 들어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입니다. 작가님 소설에서도 주변 인물들, 가족들과의 갈등이 등장하는데, 사생활이 드러나서 겪는 어려움은 없으신지, 리얼과 상상의 구분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문지혁 : 역사 이야기를 먼저 해주셨는데, 역사는 진짜일까요? 수업에서도 학생들에게 종종 이렇게 질문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역사는 허구예요. 왜 그러냐면, 어떤 특정한 위치와 시점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쓰였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도 하잖아요. 역사에는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아요. 여성들, 소수자, 장애인 등 그 당시의 역사가와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배제하고 씌어졌어요. 이것은 진짜라고 말할 수 없어요. 역사는 그런 점에서 허구입니다. 역사만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가 매일 저녁 보는 뉴스도 그런 의미에서는 허구화되어 있어요. 편집이 들어가잖아요. 똑같은 사건도 다루는 신문이나 방송에 따라 다른 사건이 되잖아요.


제가 쓰는 소설 또한 제가 새롭게 쓰는, 허구화된 저에 대한 역사예요. 저 자신과 제 주변을 질료로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이야기지만 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해요. 제가 쓰는 제 이야기 속의 문지혁은 저와는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문지혁이고, 제가 다른 이름으로 전달하는 문지혁이에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소설의 인물은 나 자신의 실현되지 않는 가능성이에요. 그렇다면 제 작품 속의 문지혁 이야기는 저 자신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죠. 그래서, 사생활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몰랐던 가상의 사생활을 발견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독자3 : 중급 한국어에 이어 한국어 실전편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옴니버스 구성인데, 소설 속 문지혁의 세계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궁금합니다.


문지혁 : 아니 에르노의 경우에는 평생에 걸쳐 거의 모든 소설을 오토픽션 형식으로 썼죠. 이분은 제가 볼 때 오토픽션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거의 자서전에 가까운, 그래서 고소도 많이 당하셨죠. 노르웨이의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자기 삶에 대해 오토픽션 형식으로 계속 쓰고 있어요. 굉장히 두꺼운 책인데, 5권까지 나왔을 거예요. 이 책이 굉장한 반향을 일으켜서 노르웨이 인구가 500만 정도로 보는데 200만 부 이상 팔렸어요. 읽어 보시면, 자기가 청소기를 어떻게 돌리는지, 아내와 어떻게 싸우다 이혼을 했는지, 온갖 이야기들이 나와요. 덕분에 아내한테는 소송이 걸리고, 주변 사람들과도 의절하는, 그런 일을 겪어요.


제 얘기로 돌아오면, 제가 다음에 쓸 한국어 시리즈는 실전 한국어라고, 제가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를 드렸어요. 사실은 그 사이에 다른 작품도 준비하고 있어요. 이 소설도 똑같이 문지혁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오토픽션 세계관 속에 있지만 현재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 보려고 해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가 어떤 분위기에 도취해 있을 무렵, 샴페인을 막 터트릴 때 이야기예요. 이 시기는 대개 학생운동 시기로 많이 기억하고 있어요. 그것도 물론 맞지만, 저는 80년대를 좀 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봐요. 제가 어린 시절 살았던 80년대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 보려고 합니다. 이유는, 오토픽션을 통해 제가 나아가고 싶은 다음 스텝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회학에서 말하는,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썼는데, 그것이 보편적으로 그 사람이 속한 사회나 문화나 맥락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 예를 들자면, 홍명보 감독 아시죠. 홍 감독이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 학위 논문이 국가대표팀을 데리고 월드컵에 출전했던 이야기랍니다. 자문화기술지 방식을 쓴 거죠. 이게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하기에는 문학적으로 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싶어요. 문지혁이라는 특수한 한 사람의 그 시절을 그리면, 단순히 그 사람만의 특수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순간 보편성을 획득하는 시점에 가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의 이 오토픽션 세계를 확장하는 소설을 실전 한국어이전에 먼저 써 보려고 합니다.


소설의 미래, 오토픽션(autofiction)이 아닐까?”

 



독자4 : 작가님이 모든 글은 수정된 자서전이라고 쓰셨듯이 무엇을 쓰든 자신의 글 안에는 자신의 경험과 주변 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는데,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들이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작가는 형제들과 의절까지 했다더군요.


문지혁 : 작가들에게는 의절하는 사람들이 자주 있습니다. 이게 되게 어려운데, 원칙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작가가 자기가 경험한 것을 가감 없이 쓴다는 게 가능합니다. 그건 표현의 자유가 가장 잘 충족되는 경우죠. 어떤 용감한 작가는 진짜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절 당하고 고소도 당하죠. 그래서 저는, 작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뭐든 쓸 수 있어야 하니까요. 다만, 현실적으로, 실전에서 제가 그렇게 가감 없이 쓰고 있냐면, 그렇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상처받을 사람들을 생각해요. 이건 누구를 비하하거나 하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에요. 있었던 일을 그냥 쓰는데도 누군가는 상처를 받거든요.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사실을 말하는 데도 명예훼손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항상 고민되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재현의 윤리라는 게 있어요. 내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썼을 때, 그것이 현실 세계에 미칠 파장이 어디까지인지 고려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내가 겪은 일들을 일정하게 왜곡하라고 조언해요. 성별을 바꾼다든지 외모를 바꾼다든지, 아니면 사건 내용 자체를 각색하거나 윤색해서 새롭게 편집하는 방식을 권해요. 이건 작가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재현의 대상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중급 한국어같은 경우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학생들 가르치는 얘기는 많이 나오는데, 왜 학생들의 글은 싣지 않느냐고. 제가 끝까지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해요.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하나는 학생들이 쓴 것처럼 제가 창작하는 경우, 또 하나는 학생 한 명의 글을 선택해서 그 학생의 양해를 얻어 싣는 경우. 고민했는데, 그렇게 되면 학생들에게 이런 사인을 줄 것 같았어요. , 이 사람 강의를 듣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내 이야기가 소설 속에 등장할 수도 있겠다, 하는. 그래서 나중에 퇴고 과정에서 다 걷어냈어요. 현실과 타협한 거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용감하지 못한 거죠.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게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족들도, 가족들한테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아 반영했어요. 다 말할 수 없는, ‘재현의 윤리가 있습니다.


독자5 : AI가 글을 쓰는 시대입니다. 소설의 미래는 어떻게 보시는지?


문지혁 : 소설에 미래가 있을까요? 제가 <크리스마스 캐러셀>을 쓸 때 챗GPT를 이용해 봤어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아웃라인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만들어 주더군요. 저는 그걸 보고, 그 아웃라인을 피해 가는 쪽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뻔한 아웃라인이었으니까요. 아마 소설가들이 앞으로 AI를 활용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어느 대담 프로그램에서 오토픽션이야말로 소설의 미래다, 라고 말했더니 진행하시는 분이 아니, 그건 당신 소설의 미래지, 왜 소설의 미래냐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소설의 자리가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에요. 마음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그건 수치로도 보여요. 제가 13년 전에 데뷔했을 때 신인작가였는데도 초판을 3천 부 정도 찍었어요. 그게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느 정도 인기가 있거나 알려져서 팔린다는 확신이 있어야 3천 부 정도 찍습니다. 지금 신인작가는 1천 부 정도 찍을 거예요. 수치로도 그만큼 줄어들었죠.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넷플릭스 같은 수많은 OTT 드라마와 싸워서 소설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저는 결국 1인칭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오토픽션이 소설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하는 겁니다. 소설이 아직 유리한 점이 있다면,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그 어떤 예술 형식보다 효과적이에요.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서 읽게 해주는 장르는 소설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다 카메라를 필요로 하죠. 3인칭 소설도 있지만, 저는 결국 1인칭 소설에 소설의 미래가 달려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독자6 : 소설에서 애매하다는 표현에 대해 사전적 의미까지 쓰면서 이야기하는데, 어떤 의도이신지?


문지혁 : ‘애매하다는 실제로 제가 많이 쓰는 표현인데, 이 소설도 좀 애매한 작품이에요. 강의 노트도 아니고 일기도 아니면서 신변잡기를 다 모아놓은 것 같은. 애매하다는 표현이 한편으로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지만,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 동시에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그 중간쯤 무엇인가인 것 같아요. 제가 사실 이 소설은 삼각형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동그라미도 아니고 네모도 아닌, 애매한 무엇. 제가 좋은 질문이 무엇이냐고 말했을 때처럼, 오나 엑스로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세모를 만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의미에서 애매한 것도 하나의 미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급 한국어에서 핵심 단어는 반듯하다인데, 중급 한국어에서는 애매하다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독자7 : 소설에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 하면서 되풀이를 강조해요. 어떤 생각이신지?


문지혁 : 저는 되풀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이 작가가 되기 위해선 어떤 재능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런데, 제가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 작가가 된 다음에 거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어요. 잘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하지만, 그 친구들은 지금 다 쓰고 있지 않아요. 천재라고 생각했던 친구들, 빛날 친구들, 참 많았지만, 그런 반짝거리는 것들은 다 사라져버렸어요. 그럼 누가 남았냐면, 저같이 재주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계속 쓰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저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되풀이는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해요. 그 되풀이, 반복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 되풀이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말이에요.


많은 분이 물어보셔요. 유명해진 것도 아니고, 책이 많이 팔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었느냐, 그 원동력이 뭐냐고요. 저의 현재 상태는 사는 것과 쓰는 것이, 어느 작가가 나에게는 똑같이 도덕적인 책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에게도 그렇게 느껴져요. 더이상 무엇인가를 원해서, 혹은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거라고. 우리의 삶도 그렇잖아요.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피투된 존재들이잖아요. 세상에 던져졌어요. 던져졌으니 살아야 해요. 그것처럼, 저도 글 쓰는 사람으로 던져졌다고 생각해요. 누가 던졌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답답하긴 한데, 그래도 이미 던져졌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쓰는 거예요. 저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원동력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라고 느껴요. 우리가 매일 밤 잠자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글을 쓰고 다시 또 다른 어떤 글을 쓰는 그 반복, 되풀이가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가 된, 그런 상태인 것 같습니다. 


프로페셔널한 작가들은 하루에 쓰는 작업량 정해둔다

 



독자8 : 소설을 쓰다가 더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어요. 망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막막해져요.


문지혁 : 모든 소설가가 작품을 쓸 때 망했다, 하고 생각해요. 망했다. 망했다, 하는 구간이 없으면 그 소설은 완성되지 않아요. 망했어요. 망했는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이걸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요. 내 소설이 처음에는 되게 반짝거려서 시작하지만, 쓰다 보면 빛을 잃어요. 소설가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토할 것 같다는 말이에요. 똑같은 걸 계속 보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모든 사람이 초고까지는 쓸 수 있어요. 그런데,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요. 거기, 토할 것 같은 거기서부터 진짜 전투가 시작되니까요.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 전투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이 글, 이 이야기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어떻게 고칠 것인지, 어떻게 이 망해 보이는 작품에서 좋은 것들을 찾아내 원래 처음 시작할 때 갖고 있었던 그 반짝거리는 부분들을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인지, 그걸 찾아내야 해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내 작품에는 분명 어떤 미덕이 있을 것이라고, 대책 없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대신, 어떻게 제대로 고쳐야 할지 알아내야 해요. 냉각기를 갖는 것도 좋아요. 한 달 정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도 방법이에요. 아무한테나, 소설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재미있는지 없는지만 말해달라고 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한테서 피드백을 받아 봐요. 그런 다음, 독자의 눈으로 다시 접근해 보면 퇴고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독자9 : 소설에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에 대해 일상을 쓰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일상을 허구화시켜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문지혁 : 제가 글쓰기를 일상에서 시작하자고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어서 그래요. 소설을 쓴다고 하면, 갑자기 특별한 공간에, 특별한 일들, 특별한 조건들을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경험이에요. 내가 경험하지 않은 특별한 일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디테일이 없어져요. 그러면 세계가 진부해져요. 내가 쓰는 이야기가 뻔해진다는 거예요. 내가 그 세계를 잘 모르니까.


많은 사람이 작가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그려요.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 시켜 놓고, 사각의 노트북 화면을 켜놓고, 창밖을 한 번 바라보다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노트북 한 번 바라보다 또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그러다 문득 영감을 얻어 글을 쓰는. 그런데 실제로는 작가가 그렇게 작업하지 않아요. 저도 물론 카페에서 작가 놀이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럴 때는 할 게 없을 때예요. 마감에 쫓길 때는 전혀 그렇지 않죠. 이건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의사든, 변호사든, 가게 주인이든 마찬가지예요. 남들이 생각하는 내 삶과 실제의 내 삶은 같지 않아요. 누구든 내 일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정확하고 디테일하게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하는 거예요. 디테일이 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럼 이걸 어떻게 허구화시킬 것인가? 좋은 방법은 내가 현실에서 하지 않았던 선택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 가게 단골인데, 그 사람에게 평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가 귀찮아할 것 같아서 하지 못했는데, 소설 속에서는 그런 디테일을 유지한 채 그 사람한테 하지 못했던 말을 하는 거죠.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요. 그런 방식으로 허구화시키면 돼요. 상상의 나래를 추상적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말을 던졌을 때 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까, 다음에는 어떤 행동이 따라올까, 그런 구체적 상황과 장면을 그려내는 거죠. 장면의 핵심은 서술, 묘사, 대화예요. 이게 같이 있으면 장면이 만들어져요. 이 서술, 묘사, 대화로 허구화된 장면을 만들어보는 거죠.


동양 문화권에서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일필휘지라는 사람이에요. 글쓰기는 절대 일필휘지로 되는 게 아니죠.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라이팅 이즈 리라이팅(writing is rewriting)’. 우리가 하다못해 카톡을 보낼 때도 썼다 지웠다 하잖아요. ‘크크를 썼다가 큭큭으로 바꿨다가, ‘흐흐를 썼다가 하하로 바꿨다가. 쓴다는 건 다시 쓴다는 것과 동의어예요. 헤밍웨이도 모든 초고는 쓰레기(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라고 했어요. ‘shit’는 쓰레기보다 더 나쁜 거예요.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은 하루에 너무 많이 쓰는 거예요. 프로페셔널한 작가들은 하루에 쓰는 작업량을 정해둬요. 작가마다 다양해요. 손으로 쓰시는 어떤 분은 하루에 200자 원고지 한 매라고 하더군요. 타이핑을 하시는 분들은 대개 하루 5매나 10, 좀 많이 쓰시는 분은 20, 이런 식이에요. 저는 그렇게 많이 쓰지 못해서 하루 5매 정도 쓰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5매면 A4로 한 장이 조금 모자라요. 그래서 A4 한 장 정도 쓰면 오늘 작업은 다했다, 그래요. 이걸 일정하게 계속하는 것이 중요해요. A4 한 장은 200자 원고지로 7.5매 정도예요. 저는 술을 잘 못 하지만, 술을 잘 드시는 분들은 소주랑 똑같대요. 7.5잔이 나온다면서요. 원고지도 A4 한 장을 꽉 채우면 7.5매가 나와요. A4100장을 쓴다면, 750매잖아요. 그러면 장편소설 한 편 분량이 나와요. 100장을 하루에, 일주일에 쓰는 게 아니라 100일에 걸쳐 쓰는 거죠. 저의 작업 속도로는. 근데, 주말에 작업을 안 한다고 하면, 한 달에 20일 작업할 수 있고, 그러면 산술적으로 장편소설 한 편을 쓰는데 5개월 정도가 걸려요. 이런 식으로 소설가들은 자기가 쓰는 단편 하나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장편이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그 작업량을 맞춰서 작업해요. 그게, 아주 좋은 의미로, 회사원처럼 해야 장편소설을 쓸 수 있어요. 술 마시면서, 영감으로, 이렇게 작업하다가는 적응하기 어려워요. 시간과 벌이는 싸움이 중요한, 그런 작업이에요.


김민영 : 질문이 많았는데, 차근차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숭례문학당에는 처음 오셨어요. 소감 한마디 부탁합니다.


문지혁 : 사실은 제가 이곳 근처 삼청동이라는 동네에서 한 20년 정도 살았습니다. 이웃한 대한상공회의소에서도 방황하던 시절 잠깐 일을 한 적이 있고요.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 작은 건물 맨 꼭대기에 이처럼 비밀의 공간 같은 곳이 있어서, 조금 신비롭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초청해 주셔서 고맙고,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