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시대의 ‘정상 가족’ 탈주하기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시대의 정상 가족탈주하기

 

권여선 단편소설 이모를 통해 본 가족 이데올로기

어느 날, A는 매주 하는 학습 모임에 늦게 왔다. 그녀는 평소 쓰지 않던 선글라스를 끼고 실내로 들어섰다. 함께하는 이들은 선글라스를 새로 장만했냐며 잘 어울린다고 했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벗은 그녀의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A는 창피하지만 집을 벗어나고 싶어 고민하다 왔다며 말을 이었다. 남편의 폭력이 그녀의 육체와 마음을 멍들게 했다. 그녀와 남편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지인들에게 가족은 뭐냐고 물었다. “()로도 맺어져 있고 법으로도 맺어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고, 벗어날 수 없고, 몸이 벗어나더라도 마음이 계속 잡고 있죠. 가족은 마음의 족쇄죠.” 50대 남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물으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시를 주면 안 될까요?”라고 했다. 이 남성처럼 가족을 정의한다는 것은 때로 어려운 수학 방정식을 푸는 것보다 까다롭다. 방정식은 하나의 정답이 있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보금자리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올가미나 족쇄, 심지어는 원수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이렇듯 가족에 대한 정의는 보편적인 설명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2013년 여름부터 2015년 겨울까지 발표한 일곱 편의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다. 이 중 이모는 좌절된 연애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짐 지워진 이모의 삶을 보여준다. 이모는 쉰다섯 살에 홀연 사라지기까지 결혼하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하며 가족을 건사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췌장암이라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 한 장 써 놓고 사라진다.


당분간 모든 관계를 끊고 살겠다.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78)


 


이 짧은 문장은 그동안의 이모 삶을 짐작하게 한다
. 가족은 를 존재하게 하고 의 삶을 증명해 주는 이들이다. 대부분 가족은 가장 가깝고 그 무엇으로도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사랑과 신뢰, 때로는 목숨을 바쳐서도 지키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다. 가족을 위해 개인적인 삶을 묻어두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 충실을 기꺼이 선택한다. 가족이 나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모는 자신의 삶을 착취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가족과의 연을 끊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고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서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현대로 갈수록 가족은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이 나를 잠식시키는 대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족에 대해 부정적일까. ‘이모에서 그려지는 가족은, 가족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굴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모의 삶을 억압하고 침잠시킨다. 이모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부양하고, 평생 번 돈은 남동생의 도박 빚으로 잃는다.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이모가 가족에 대한 부양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천하에 몹쓸 인간, 가족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없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사회적 비난과 가족 구성원의 원성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굴레에서는 가족 간의 친밀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부양 책임을 가족에 대한 애정과 동일시하는 사회에서는 세상의 이모들은 설 자리가 없다.

소설 속 이모는 화자 에게 내 피붙이가 아니라는 게 더 좋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86)라고 말한다. 이모는 잠식당하는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가족과의 단절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췌장암으로 죽음을 맞게 되자 가족과 화자 에게 유산을 남긴다. 안타까운 장면이다. 이모는 유교문화의 핵심으로 거론되는 혈연성과 공동체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사회가 부여한 정상이라는 가치에서 탈락하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 그녀가 말한 것처럼 피붙이여서 자신의 마음 가는 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기 어려웠던 탓일까. 어쩌면 한국의 가족주의가 여전히 전통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모에게 가족은 자연재해 같은 것은 아니었는지. ‘정상 가족을 운운하며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시대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서의 탈주가 시급하지 않을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의 부모권력을 가족 안에서 증명하려 한다. 출구 없는 가족관계에서는 죽음과 단절 등의 가차 없는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각 개인의 인권, 즉 합리적 개인주의 관점으로 변화를 시도한다면 단절이 아니어도 가족의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희진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관념적으로는 긍정적, 진보적 가치로 간주하지만, 여성 인권처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한국 사회의 주류 가치인 가족주의와 경합할 때는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 된다(아주 친밀한 폭력,교양인, 2016, 249)라고 했다. 가족주의가 사회적 약자와 경합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족이라 명명하는 개념이 변화되어야 한다. 솔닛은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라고 했다. 가족주의가 함의된 가족의 개념이 아닌 가족 내 개인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개념으로 명명된다면 지치고 힘들 때, 자아를 찾고 싶을 때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친밀감과 보호의 근거지로 가족이 존재하지 않을까.

A는 수많은 갈등과 고민 끝에 이혼을 결심했다. 자신에게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으로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던 그. 그는 자신이 이혼을 결정함으로써 가족 해체의 주 인물이 되는 게 괴로웠다고도 했다. 이제는 가족과의 관계 단절을 가족 해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기존의 시각은 변화되어야 한다. ‘이모가 가족과의 관계를 원치 않았던 것이 사회적 비난의 문제가 아니듯, A의 이혼이라는 결정 또한 개인의 인권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인생에는 누구의 탓이라 책임 지울 수 없는 비극이 산재한다. 이모의 삶이 비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롯한 그녀를 인정해 줄 때 가능하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곤경이나 어려움에 밀착한 사람들, 상실한 그들이 그것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 그 이후의 선택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전했. 그녀가 취기 어린 눈으로 인물들의 아슬아슬한 내면을 서늘하게 포착하고, 벼랑 끝까지 떠밀어 그들이 맞는 절망을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이유이다. 한 개인의 존엄을 도외시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가족을 규정한다면 시대가 몇 억 급이 변한다고 해도 가족 이데올로기는 변하지 않고 재생산될 것이다. 권여선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작품세계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 ㆍ류경희 / 숭례문학당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