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읽기 체험이었다”
10월 한 달 동안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2013)를 읽었다. 소설은 남북 전쟁 후 와해되어가는 남부의 실상을 제퍼슨이라는 가공의 땅의 대지주인 콤슨 가의 몰락 과정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린다. 네 개의 장은 콤슨 가 4남매 중 세 명이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막내인 벤지, 장남인 퀜틴, 셋째 제이슨 순서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불연속적으로 기록한다. 마지막 장은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는데 사남매를 키운 흑인 하녀 딜지의 목소리를 담는다.
내밀한 의식 안에 두 겹, 세 겹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들이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병렬 서술하는 문장들, 간단한 대화조차 너무 많은 함의와 너무 많은 과거 인장들을 끌고 와 미래와 절연하는 문장들,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파편화된 음절만을 허락받은 벤은 본능적으로 감각할 뿐 표현에는 가장 취약하다. 현란하나 공허한 언어와 과거에 못 박혀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자멸하는 남부의 이상 퀜틴, 나무 냄새와 인동덩굴 향기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기는 쓸쓸함, 상대적 박탈감을 만회하고 보복하려는 냉소적 인물, 구원자는 되지 못하여도 시간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일가의 흠결을 기꺼이 받아 안는 딜지의 헌신 등 <소리와 분노> 읽기는 서사와 전개해 나가는 형식을 통해 고루 특수하고도 있을 법한 이야기를 증언한다.
소설은 사적인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이다가 커다란 질문으로 경고하듯 묻기를 반복한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이야기는 어느새 보편성을 획득하여 현대의 독자에게 들어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종소리와 시계소리, 울음소리와 고함소리 등 소음이 요란하고 인동덩굴 향기는 감옥 같은 시간으로 끌어당긴다. <소리와 분노>는 독자를 분주하게 만들고 드러난 상황의 진실과 대립 항을 수색하느라 지치고 피로하게 한다. 그럼에도 무한히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은 넘치고 거울이 되어 독자를 비춘다.
고통에 찬 한 가족의 내리막길을 독자가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조로 되풀이하는 아버지의 조언 뭉치는 아들을 결국 망치처럼 부순다. 아버지의 말들은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있으나 부재중이었다. 아니 부재만 못했다. 작가는 뿌리박힌 관습에 의탁하여, 또는 편협한 합리화와 아집에 사로잡힌 채 틀 안에 갇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고발한다. 화자를 바꿔가며 시간을 복기하는 이유는 작위를 지양하고 진실에 다가서라는 신호가 아닐까. 책임 회피와 의무의 방기가 일으키는 파장을 알아차릴 것, 쉽지 않지만 유혹도 위험도 민감하게 감지하라는 경고등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마지막 단락을 반복해 읽으며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라는 맺는말이 허망함을 배가시킨다. 딜지 섹션은 1928년 4월 8일 시점인데 책 말미 작가의 서명과도 같은 <1928년 10월 뉴욕 주 뉴욕 시에서>에 이르면 또다시 의아하다. 혼란한 시간의 흔적, 콤슨 가의 비극으로부터 작가는 한 발 떨어져서 관조하는 것 같다. 더 이상은 이 비극에 한 마디도 보탤 게 없다는 듯이 거리를 두면서 봉인한다. 미래의 새로운 독자들이 폐허를 찾아올 따름이다.
편치 않은 시간을 함께 해주신 참여자분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제주도-추자도 트래킹 여정 중에도 발췌와 단상을 빠짐없이 올려주신 선생님, 바쁜 중에도 같이 읽어내시고 나눠주신 분들이 계셔서 흡족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모순적이고 연약한 면을, 편협하고 이기적인 심리를, 벗어나고자 애쓰나 결국 실패하는 비극을, 그 비극을 누군가는 외면하지 않고 포옹하고, 누군가는 기록한다는 위안을 치열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아껴가며 거듭 읽게 된다.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쓰인 작품은 일독이 아니라 재독하라”고 했던 지드의 조언처럼 다시 첫 장을 펼칠 날을 기쁘게 기다린다. 지난 한 달을 잊지 못할 것이다. 감사드린다.
━ 진행자 김은신
* 이 소설은 잘 숙성된 포도주와도 같아서 음미할수록 더 깊은 맛을 알 수 있습니다.(역자 공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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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너 소설 읽기는 현대 추상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다. 고전주의나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들을 보면 그냥 척 봐도 아름답거나 거룩하다고 느껴지는데, 현대 미술은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 것과 같다. 현대미술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인상주의나 표현주의 작품들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이해도 가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 모더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예술가들이 과거의 전통적인 작법들을 의식적으로 타파하고 새로운 것으로 혁신하며 작품을 창조하였기에 모더니즘 작품들을 감상하려면 전통적인 감상법과는 완전히 다른 독법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이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가 모더니즘 작품을 읽고 이해하려면 힘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포크너의 작품들은 '소설가의 소설'이요, '모더니즘의 금자탑'이라 한다. 소설가도 아닌 일반 독자가 소화해내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쓴 작품이라 일독, 재독을 하라 한다. 작가가 입에 떠먹여 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독자가 재구성하며 읽는 적극적 독서를 요구한다. <소리와 분노>를 읽으며 한 달간 머리에 쥐가 나는 경험을 했다. 사서 고생한 기분이 든다.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고생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 다음 달 《압살롬, 압살롬!》 읽기에 또 도전한다. 다행히 일 년만의 재독이니 생고생은 하지 않을 것 같다. 포크너의 작품에는 힘든 독서를 기꺼이 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 오용*
포크너 읽기 도전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읽기 체험이었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와 <소리와 분노>는 같은 시대 미국 남부의 농촌가의 몰락해가는 가문을 그렸다는 점에서, 또한 작품 속 인물을 챕터별 화자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겹친다. 시간적 흐름이 불연속적이어서 다소 헷갈리기도 했으나 오히려 그 점이 좀 더 천천히 숙고하며 인물을, 시대상황을 분석적으로 읽게 만들었다. 올려주신 샘들의 발췌와 단상 덕분에 보다 풍성하게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함께 읽기 최고의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곰>이 좋았다. 앞 두 작품과 다른 포크너의 또다른 성찰과 가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압살롬, 압살롬!>은 또 얼마나 독자를 헤매게 할까? 포크너 읽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완독에 이르지 못해도 맛보고 싶다^^ 은신샘과 함께라면♡
━ 한우*
포크너는 천재가 맞는 것 같다. 하나의 사건을 4개의 시선으로 완성한 점이 탁월한 듯하다. 4개의 장은 각기 독립된 단편 소설처럼 움직이다가 결말에 이르러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벤지의 시선, 퀜틴의 시선, 제이슨의 눈, 딜지의 세계는 실존인물이 아닐까라는 감탄이 나온다. 작가의 정제된 집중력과 통찰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100년 전, 미국 남부라는 가본 적도 없는 곳에서 펼쳐진 이야기인데 오늘 나에게 어마어마한 인싸이트를 준다. 이해하지 못한 친구, 속을 알 수 없는 어른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해준다. 나도, 그들도 내던져진 이 세상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다는 마음이다. 선악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글이 어려워서 힘들었는데 매일 피드백 주시는 리더 선생님과 함께 읽어가는 동료 선생님들 덕분에 완독하게 되었어요. 10월이 뿌듯해집니다. 함께 하는 힘을 다시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 박*희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 온라인 독서 모임을 통해 읽게 되었다.
첫 장부터 난해하다.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1928년 4월 7일 막내 벤지의 시각, 2장 1910년 6월 2일 퀜틴의 시각, 1928년 4월 6일 제이슨 시각, 4장 1928년 4월 8일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썼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모더니즘이 절정에 달한다. 1922년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스), 엘리엇(황무지), 버지니아 울프(제이콥의 방)에 이어 미국에서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가 나왔다.
<소리와 분노>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되고 시간도 왔다 갔다 교차된다. 목차부터 그렇다. 1928년에 시작했다가 과거인 1910년으로 갔다가 다시 1928년으로 돌아온다. 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생각해 보면 하루에 한 사람이 많은 생각을 한다. 그걸 일일이 들여다보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인지 몰랐다.
특히 첫 번째 주인공 벤지는 지적 장애가 있다. 세 살 수준의 정신연령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문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청각, 후각 등으로 묘사된다. 어떻게 보면 CCTV를 통해서 보는 느낌이 든다. 1910년으로 시점이 돌아가는 이유는 퀜틴이 그 해에 자살하기 때문이다. 퀜틴의 고립은 추상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으로 보이지만 내면은 고립되어 있고 비이성적이다. 3장의 제이슨이 가장 혐오스럽고 막나가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4장에서는 그나마 객관적으로 콤슨 가족의 상황을 보여준다.
포크너는 <소리와 분노>를 통해 몰락해가는 미국 남부의 상황을 한 가족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요즘은 다양한 시각과 시점으로 소설들이 나오지만, 100년 전에는 새로운 시도였을 것 같다. 형식 면에서도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내용도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완벽히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다른 포크너 책도 독서 모임을 통해서 읽어야겠다. 절대 혼자 읽기 쉽지 않다. 기회가 되면 영어로도 읽어야겠다.
- 함께 읽을 수 있어서 힘이 됐습니다. 절대 혼자 못 끝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 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