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독서 도반들과 한 달간 함께한 『스토아 수업』 읽기를 마치며 그동안의 소감을 정리합니다. 제가 스토아 철학을 함께 읽자고 제안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저자 에릭 와이너가 말한 것처럼 스토아 철학은 ‘나이든 사람을 위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토아 철학을 “몇 번의 전투를 이겨내고, 패배도 몇 번 해보고, 상실도 경험해본 이들을 위한 철학”이라고 소개한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나이를 먹으며 겪게 되는 온갖 풍상을 굳세게 이겨내는데 스토아 철학만큼 도움을 주는 철학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스스로 감내하기 힘든 역경에 부딪히곤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냥 절망과 회한에 사로잡힌 채 체념 내지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런 좌절의 상황에서 탄생했습니다. 이천삼백여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스토아학파를 창시한 제논은 배가 난파되어 자신의 전 재산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는 난파했으나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재앙을 만났으나 역으로 불행에 대처하기 위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과 같이 부유한 삶을 좇는 대신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공부에 자신의 남은 생을 바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소한 행위에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스토아 수업』은 이렇게 시작해 대를 이어온 26명의 스토아 철학자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으로 다양한 경력과 직업, 그리고 기질의 소유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토아 학파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최고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그들이 내세운 덕은 네 가지, 즉 지혜와 용기 그리고 절제와 정의로 압축됩니다. 급기야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를 거쳐 신생 로마제국의 공동체를 이끄는 철학으로 우뚝 섰습니다. 형이상학적 진리 추구보다는 삶의 실용적 태도를 중시한 로마인들에게 마침한 철학으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완전하고 고결한 삶을 산 건 아닙니다. 포악한 황제에게 죽임과 추방을 당한 인물이 적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당히 타협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이런 고난과 굴절의 과정을 거치며 삶의 실천적 윤리로 자리잡아 나갔습니다. 글을 통해 스토아 철학의 진수를 전한 이들이 있었고 실천을 통해 감동적 삶의 모범을 보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스토아 철학이 그토록 중시한 삶의 윤리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단어, 아파테이아(apatheia)로 정의됩니다. 우리말로는 무관심 내지 무심이 될 것입니다. 아니, 무관심이라니? 무심하게 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휘둘리며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사 모든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닌데 그것들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삶의 실천 윤리를 중시한 스토아 철학은 이성의 힘을 특히 강조합니다. 매사에 감정적 반응을 내려놓고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기를 권합니다. 세계를 철저히 인과적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본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적 질서에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이고도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보았습니다. 육상 선수 출신으로 스토아 학파의 두 번째 창시자로 알려진 크리시포스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신이 지금 질병을 나에게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질병을 추구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삶의 결과에 너무 연연하며 살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삶의 결과적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든지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니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살라는 조언입니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스토아적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살짝 아쉬움이 듭니다. 스토아 철학이야말로 참으로 건조하고 재미없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의문입니다. 스토아적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삶의 소소한 재미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시 한 번 앞서 언급한 제논의 말을 떠올립니다. “사소한 행위에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사소한 행위에서 얻는 행복이 과연 진정한 행복일까요? 일상에서 웃다 울며 사는 것이 인생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변치 않는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데서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토아 철학이 “삶의 많은 것은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마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의 단련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금강경』 해설서에서 인간의 복덕을 홍복(鴻福)과 청복(淸福)으로 구분해 설명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홍복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얻는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이것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불행을 느끼기 쉬운 게 우리네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좇다 나락에 떨어져 후회의 삶을 산 사람이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도 있다는 걸 『스토아 수업』은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 청복은 이런 외적인 가치들에 초연한 가운데 마음의 자유로부터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청복이야말로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성경에서 예수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요.
이제 저는 우리 책에 소개된 두 명의 대조적인 스토아 철학자의 삶을 음미하며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바로 노예 출신 철학자 에픽테토스와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입니다. 노예와 황제. 이 양극단에 위치한 두 인물이 스토아 철학자라는 게 많은 시사를 줍니다. 어떤 경우에 처해도 온전히 덕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는 걸 두 사람은 보여줍니다. 노예 신분이었음에도 에픽테토스는 결코 뺏길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자유였습니다. 에픽테토스에게 그것만큼은 감히 누구도 침범하고 간섭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었습니다.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 몸을 아무 사람에게나 줘버린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왜 내 마음과 생각, 감정을 남의 장단에 놀아나도록 맡겨버리는가?” 그는 또한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누군가 한 대 치거나 욕을 했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모욕당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그 일을 모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난다면, 내 정신도 그 공범임을 기억하라.” 한편, 어떤 사태에 대한 선명한 인상이 일어날 때 에픽테토스는 그것에 빠져들지 말고 다음과 같이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인상이여, 잠시 기다리게,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해주게. 너를 따져보게 해주게.”
로마의 오현제 중 한 명인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쓴 인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무너지기 쉬운 자신을 경책하며 쓴 책일 뿐입니다. 부족함이 없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황제가 이런 일기 같은 글을 쓰다니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 역시 나약하고 탐욕스럽고 화내기 쉬운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절대 권력자가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이런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르쿠스는 달랐고, 그래서 그는 위대한 철인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완벽하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도를 탄압했고 네로만큼 포악한 친자 콤모두스에게 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여덟 명의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며 슬픔을 삼킨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흠잡듯 굳이 마르쿠스의 어두운 부분을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완벽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스토아 철학은 진정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걸까요. 저는 스토아 철학이 진실로 강조하는 것은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덕의 인간으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를 향해 노력하는 삶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스토아 철학이 전하고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덕,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천여 년 전 스토아 철학의 현인들은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르쿠스의 여러 명언 중 인생의 운과 죽음에 대해 쓴 두 글을 발췌하며 『스토아 수업』 읽기에 대한 저의 소감을 마치고자 합니다.
“‘운이 나빠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말고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 일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미래에 일어날 일도 두렵지 않으며, 이렇게 아무런 해악도 입지 않고 멀쩡한 것이 행운이다’고 말하라. 누구나 그런 일에 해악을 입지 않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글 / 윤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