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동양 편》 함께 읽기를 마치며



동양 철학에서 배우다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동양 편》 함께 읽기를 마치며

 


칠 주간에 걸친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동양 편》 함께 읽기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두꺼운 철학사를 읽고 발췌와 단상을 올리느라 선생님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뿌듯함과 더불어 아쉬움도 크리라 생각합니다. 아쉬움이 있더라도 자책까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대한 동양 철학의 역사를 한 번 읽고 다 소화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바쁜 일상 속에서 생각을 자극하는 철학적 질문들에 온전히 빠져들기란 더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한술에 배부를 수 없습니다. 철학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지금의 작은 노력들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인생의 든든한 지양분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번 동양 편 33장 읽기를 통해 선생님들은 무엇을 얻고 느끼셨나요? 방대한 동양 철학사를 주마간산 격으로 요약해 봅니다. 동양 철학의 원조는 두 나라, 즉 인도와 중국입니다. 고대 인도에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베다신앙이 존재했었고, 이에 맞서 무아(無我)를 주창한 싯다르타의 불교가 생겨났습니다. 불교는 이후 다양한 논쟁과 파벌을 형성하였는데, 이 중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승 불교였습니다. 한편, 고대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는 이른바 제자백가에 의한 사상의 백가쟁명과 실험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왕조 시대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철학은 유교와 불교와 도교, 즉 유불선 삼교입니다.


도교와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부침을 겪는 과정에서 민중 신앙으로 뿌리를 내린 반면, 왕조 시대 중국 사회를 이끄는 정치 이념으로 패권을 잡은 것은 유교였습니다.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적 틀을 원용하여 치열한 이론화 작업을 거친 유교가 송대(宋代) 이후 중국인의 중추적 세계관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를 신유학(新儒學)이라 부릅니다. 신유학은 한마디로 삶의 실천 윤리를 강조한 고대 유가사상에 이론적 체계를 입힌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칸트의 관념론이 저수지 역할을 했다면 동양에서는 신유학의 중심인 주자의 성리학(性理學)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동양 철학의 거의 모든 사상적 논쟁은 신유학의 키워드인 , , 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세기 이후 근대의 길목에서 수입된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기계론적 과학 문명이 이런 유학의 견고한 틀에 균열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땅, 한국에서의 철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땅에서의 철학은 중국의 그것과 괘를 같이 했습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통일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꽃피었고,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지배적 사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상의 전개 양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대주의(事大主義)입니다. 사대주의를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뒤처진 나라가 앞선 강국의 이념을 배우고 본받는 것은 실리적으로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키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조선 시대의 사단 칠정 논쟁도 비록 심오하기는 하였으나 주자학이라는 판을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땅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기여한 의상과 지눌, 그리고 이황을 비롯한 유학의 대가와 비판적 사상을 전개한 정약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선현들이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철학을 만드는 데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인용한 단재 신채호의 다음 글이 정곡을 찌릅니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한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노예의 특색. 그런데 저에게는 이 글이 자꾸만 저를 향한 소리처럼 들립니다. “석가가 들어오면 나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내가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나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내가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나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내가 되려고 한다.” 제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진한 아쉬움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의 나, 공자의 나가 아닌 나의 부처, 나의 공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저자 강신주가 프롤로그에서 인용한 칸트의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는 말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와 공자의 사상을 제 스스로의 이성으로 깊이 사유할 때 비로소 나의 부처, 나의 공자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태도로 저는 이번 동양 편 읽기를 통해 저의 정신에 지적 자극을 준 세 가지 화두를 건졌습니다.


첫째, 싯다르타의 무아(無我) 사상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나라고 내세울 자아라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2의 붓다로 불리는 나가르주나는 이를 공()으로 설명했습니다. 연기(緣起)라는 관계의 세계 속에서 나란 존재의 정체성은 잠시 형성되어 나타날 뿐 영원한 실체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때 저는 붓다의 이 무아론과 연기론을 듣고 허무주의에 빠졌었습니다. 나라는 실체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는 가르침이 저를 오랫동안 허무의 늪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무아와 공의 관념을 통해 무한히 열려 있고 가변적인 삶을 사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얼마나 축복의 삶입니까. 어제의 고통스런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며 오늘의 행복한 내가 내일의 내가 될 수 없음을 늘 가슴 속에 품습니다. 단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집착하지 않으면 됩니다. 바로 싯다르타가 강조한 중도의 길입니다. 어제의 나를 내려놓고 오늘을 살며, 오늘 하루치 나를 떠나보내고 내일 새로운 나를 맞이한다면 삶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공자의 타자 배려 사상입니다. 공자의 사상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계급 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이 점을 고려하여 그 메시지를 음미해야 합니다. 공자의 사상을 압축하면 인()과 서()입니다. 둘 다 어짊을 뜻합니다. <논어 위령공> 편에서 공자는 서를 설명하며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라는 뜻의 이 성어를 저는 중학교 한문 시간에 배웠으니 50년 이상 제 가슴에 새겨진 글귀인 셈입니다. 비록 지배층에 국한해서 한 말이긴 하지만 공자의 이 경구는 타인을 배려하며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타인을 사랑과 예의로 품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자 강신주는 장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공자의 이런 타인 배려에도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장자 지락> 편에 나오는 바닷새 이야기를 들려주며 진정한 타자 배려는 자신이 아닌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입장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타자를 배려하라는 메시지를 가슴에 새깁니다,


마지막으로, 노장(老壯)의 도가(道家) 사상입니다. 동양 철학에서의 도()는 서양 철학에서의 진리와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노자와 장자는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출발점은 전혀 다릅니다. 한마디로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도입니다. 노자는 하늘의 도를 따라 자신을 낮추고 비울 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장자의 도에는 애당초 그런 주어진 도라는 게 없습니다. 장자의 다음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도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구분된 것이다.” 장자의 도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질 뿐입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큽니다. 노자의 형이상학적 도는 당대(唐代)에 발달한 불교의 화엄 사상과 함께 권력 지향적이자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표출합니다. 나아가 이 속성은 신유학에도 그대로 이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자의 도와 함께 공자의 인()과 싯다르타의 무아(無我)에는 이런 전체주의적 지향이 없습니다. 공자는 권력 지향적 성향을 표출했지만 장자와 싯다르타에게는 이마저 없습니다. 이들 철학에서는 개인, 즉 나란 주체와 타자가 중요할 뿐입니다. 저는 전체성보다 개체성을 강조하는 철학에 더 공감합니다. 남은 인생 저는 진리의 길을 관조하며 따르기보다 저 스스로 만들어가는 길을 걷고자 합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중국 선종(禪宗)의 임제 선사가 한 이 말은 언제 어디서나 너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 그 곳이 어디든 진리 아닌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이 곧 진리의 삶을 사는 길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 어떤 절대적 교조적 진리에도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선택으로 살라는 조언입니다. 주인이 된다는 건 온전한 자유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무아로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를 언제나 텅 비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동시에 모든 것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전정한 자유의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바로 무수히 마주하는 타자들입니다. 타자와의 우연적 만남을 피하지 말고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사는 것 외에 달리 무슨 좋은 인생의 방도가 있을까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以生其心)! 일자 무식꾼 육조 혜능이 단박에 깨침을 얻었다는 금강경의 이 한마디처럼 살면 되지 않을까요.


글 / 윤영선 강사